초가지붕에 눈이 내리면
초가지붕에 눈이 내리면
윤기 잃은 초겨울 햇살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날에 아버지는 양지에서 이엉을 엮었다. 마지막으로 용마루를 틀면 지붕을 새로 이을 준비를 마쳤다. 지난초겨울에 이은 지붕이 태양과 비바람에 삭아 잿빛으로 변해 묵은 이엉을 걷어내고 새로 엮은 이엉으로 교체하는 일을 마지막으로 겨울 준비를 마치게 된다.
강한 북서풍이 불어 낡은 이엉을 밀치거나 걷어 올린 곳으로 많은 눈이 쌓였다가 녹을 때 천장으로 흘러내리면 추운 겨울에 큰일이었다. 집집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지붕의 헌 이엉을 걷어내고 새로운 이엉을 덮었다. 그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아니어서 눈썰미와 손재주 있는 사람의 몫이었다. 그 사람은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각자가 맡은 역할을 하게 하여 일사분란하게 지붕 덮는 일을 했다.
우중충한 잿빛 헌 지붕을 걷어내고 새 볏짚으로 엮은 이엉으로 지붕을 덮은 후 굵은 새끼줄로 거미줄을 엮듯이 촘촘히 묶었다. 그리고 이엉이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기 위해 새끼를 굵고 긴 대바늘에 새끼를 끼워 박음질을 했다. 한 집 두 집 새로 엮은 이엉으로 지붕을 덮고 나면 우중충했던 잿빛이 윤기 나는 노란색으로 바뀌며 멀리서 보면 만추에 황국이 핀 듯 산뜻해졌다. 그러는 사이 겨울은 깊어지고 밤새 함박눈이 내려 지붕은 순백의 눈부신 풍경으로 변했다.
하얀 눈은 집 주변 산과 들에도 쌓여 순정(純情)을 자아냈다. 눈 덮인 들판은 그야말로 고요한 침묵의 세상이었다. 아무도 걷지 않은 들판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달리다 지쳐 누우면 청절한 희열이 사로잡혔다. 들판 너머 먼 산 위로 붉은 태양이 솟으며 눈 쌓인 들판을 덮을 때 싱싱한 아침의 피돌기처럼 장엄한 빛이 눈 위에서 빛났다.
집집마다 부엌에서 밥을 짓거나 군불을 때면 야트막한 지붕 굴뚝에서는 회색 연기가 피어올라 처마 밑으로 엎드리며 낮게 깔렸다. 연기가 토방으로 번지며 자욱한 안개처럼 휘감아 돌면 눈 쌓인 초가집에 풍경화가 그려지곤 했다. 회색 연기가 자욱하게 마을을 덮는 저녁때가 되면 눈이 덮인 초가지붕은 더 낮게 엎으려 소박한 자태로 서 있고, 심심한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골목을 누빌 때, 산사에서 들리는 저녁 범종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마을 앞 늙은 팽나무 눈 덮인 가지까지 찾아오곤 했다.
노을이 지며 잘 닦인 은동전 같은 달이 떠올라 달빛을 쏟아내면, 들판은 설원이 되어 눈부시게 반짝이며 작고 섬세한 홑씨 같은 아름다움을 뱉어냈다. 늙은 마을에 동화처럼 찾아온 눈 쌓인 풍경은 숨결마저 동심으로 젖어들었다. 시리도록 찬 시퍼런 하늘에 달빛이 쏟아졌다. 어쩌다 바람은 검은 구름을 앞세우고 불시에 찾아왔다. 검은 구름은 눈으로 변하고 바람은 안방 할아버지의 잔기침 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문풍지를 두드렸다.
눈 위에 부서지는 달빛이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게 빛날 때 헐렁한 문종이에 희미한 등잔불이 전설처럼 깜박이고, 마루 밑 누렁이의 싱거운 컹컹거림이 적막의 깊이를 더해가며 눈 쌓인 시골의 밤은 깊어갔다. 초가지붕 이엉 끝에 매달린 고드름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리움을 키우며 풍경소리 같은 눈바람에 홀로 떨고 있었다.
그 겨울은 이제 전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