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시나무
은사시나무
어느 초등학교 언덕에 은사시나무가 서 있다.
자작나무와 四寸쯤 될 것 같은.
봄에 여린 잎이 돋을 때부터 줄곧 흔들렸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작은 소리도 속삭일 때도
싸움을 하며 악에 받혀 소리 지를 때도
급식 조리실에서 콩나물국이 끓는 소리에도
입김 같은 봄바람에도
참새들이 앉아 머리를 이리저리 기우 거릴 때도
명주실 같은 가랑비에 젖을 때도
누가 나무라지도 않는데 늘 떨고 있다.
떨고 있다.
밑동부터 하얀 줄기 우듬지까지 멍이 들었다.
시커먼 상처를 늙어서도 굴욕처럼 달고
끝내 지우지 못했다.
걸핏하면
회색 등을 드러내고 우는 하얀 나무, 나뭇잎.
은사시나무!
고고하게 흰 몸을 지키고 있어 白楊나무라 불리지만
자작나무처럼 우아하지 못하고
떨기만 하니
영어로는 떠는 나무(tremble tree)라 불리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심장을 가진 나무.
날마다 身熱로 떠는 잎들
코로나19가 없을 때도
심하게 떠는 나무.
그렇게 떨다가 된서리 오기 전
무서리에도 제풀에 겁이 나
가지 끝 가녀린 몸매 차마 지탱하지 못하고
운동장으로, 가파른 언덕으로 추락해 버린
사시 나뭇잎들.
하얀 눈이 발목까지 덮어주자
잎이 없어 온몸으로 떨던 은사시나무는
편히 밤을 맞았다.
그래.
나도 한 그루 사시나무
발목에 눈이 덮여 편히 잠이 들고
사시나무 아래
내가 떨고 있다.
비로소 알았다. 사시 나뭇잎이 떤 이유를
미움에도 끓어오르지 못하는 분노
사랑에도 뜨거워지지 못하는 가슴.
기껏 홀로 울다가
미리 떠났다.
은사시나무 간이역
유가형
2월의 오후 세 시 간유리같이 얇은 햇빛 아래 은사시나무는 몸이 시리다
밑둥에 가끔 신문지가 날아가 감기고 가스랑잎이 찰박거려도
은사시나무 은빛 신음은 햇빛만 안다
몸이 시리다
물기란 물기 죄다 아래로 쏟아
발 아래 누런 흙더미 아래 그것들이 모인 습지 아래
처음 가족들 모여 살았던 곳
거기서 부는 바람은 몸 속으로만 통한다
터널을 통과하는 통증처럼
몸 속으로 바람이 지나간다
가족들은 기차를 타고 바람처럼 떠났다
2월의 오후 세 시 간유리같이 얇은 햇빛 아래 은사시나무
우두커니 선 간이역
철도원 혼자서 물고둥을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