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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종종 담배 피우는 이들과 마주치곤 한다. 대개는 남성이지만 드물게 여성일 때도 있다.
아파트 단지 중앙으로는 차도와 인도, 그 끝 모서리 뒤편으로는 작은 길 하나가 숨어 있다. 동 사이 정원에는 소나무 같은 교목과 나지막한 관목들이 어우러져 있는데, 사람들은 대개 나무 밑이나 건물 모서리, 혹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길목에서 담배를 피운다
여성들은 대개 모서리나 관목 사이 작은 길에서 피우다가도, 내 발소리가 들리면 얼른 자리를 피한다. 미처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가까이 가면 화들짝 놀라 황급히 사라지는 이도 있다.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다. 서둘러 몸을 숨기는 그 뒷모습이 못내 안쓰러워 언젠가 한 번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냥 편하게 피우세요. 죄짓는 것도 아닌데요….”
하지만 그 후로도 그녀들은 발소리만 나면 서둘러 자취를 감췄다. 담배도 기호식품으로 분류한다. 먹는 음식에 남녀 구분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여성이 담배 피우는 모습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세상이 말세라도 된 듯 혀를 차기도 한다.
어느 겨울 새벽, 담배 피우는 여자
회색갈피
아파트 사이 느티나무가 노을에 물들어, 젖은 잎들이 더욱 붉게 타오르던 날이었다. 등을 보이고 앉은 한 여인이 처연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젊은 여인의 그 모습은 불량하기보다는 칙칙하게 조여오는 우울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만약 내 망막에 다시금 그런 잔상이 맺힌다면, 임계각에 다다른 삶의 질량이 금방이라도 기우뚱 휘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삶이란 늘 반복되는 어리석음의 연속이었을까. 발목까지 눈이 차오른 어느 겨울 새벽 출근길이었다. 숯검정 같던 어제의 어둠은 간데없고 세상은 온통 눈부신 흰 빛에 덮여 있었다.
길가 카페의 불 꺼진 창가 너머로, 카바이드 불꽃처럼 타들어 가는 작은 점 하나가 보였다. 통유리 옆 탁자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젊은 여인이었다.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머리카락보다 더 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카페 안,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스미며 가늘게 흔들렸다. 저 흔들리는 연기는 그녀의 무거운 삶과 충돌한 후 섬광을 내며 분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연기가 허무가 아닌, 단단한 다짐이나 희망이기를 빌었다.
낡은 구두 밑창이 눈길에 미끄러지며 내 몸도 휘청거렸지만, 그렇다고 걷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 삶도 네 삶도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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