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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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단편 2024. 5. 29. 11:31
휴게소로 들어가 차를 세우고 오른쪽 끝으로 가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곳을 지나 벤치가 몇 개 있는 곳으로 갔다. 뻐근한 몸을 가볍게 풀고 벤치에 앉자 바로 옆에 개망초가 무더기로 하얗게 피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개망초 꽃을 볼 때면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생각난다. 비쩍 마른 몸에 퀭한 눈을 반짝이며 슬픈 표정으로 체념한 듯 앉아있는 모습.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앉지만, 이 땅 어디를 가도 슬픈 눈빛으로 피어 있는 꽃.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석진이 입원한 병실에 도착했을 때 점심 식사를 끝낸 듯 흰 모자를 쓴 여인이 지저분한 식판을 층층이 쌓은 캐리어를 밀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좀 어때?” 휴게소에서 꺾어온 개망초 꽃과 꽃집에서 산 안개초 꽃을 탁자 위 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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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단편 2024. 4. 7. 16:00
“야, 친구 좋다는 게 뭔데? 친구가 다리가 아파 걷지 못하니까 커피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하는데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냐?” 세면기 수도꼭지에서 물이 조금씩 세는데 손을 보지 못해서 오늘은 고치려고 생각하고 수도꼭지를 사러 막 나가려고 하는데 도신이 전화를 했다. “운전도 못 해?” “할 수 있으면 전화하겠어? 네 놈 잔소리라면 머리가 아픈데.” “커피믹스 마시면 안 되겠냐?” “친구야, 부탁한다.” 커피 사다 주고 오면서 일을 보려고 도신이 알려준 카페로 갔다. 오십쯤 돼 보이는 주인 여자가 책을 읽고 있다가 일어서며 웃었다. “도신이 아세요?” 사장이 주방으로 가며 쿡쿡 웃었다. “왜 웃으세요?” “도신 그분한테 당하셨군요?” 등에 둔탁하고 무거운 돌이 떨어지는 듯 안 좋은 느낌이 왔다. “예?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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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이유단편 2024. 3. 26. 13:10
준호의 얼굴이 요즘 초췌하게 변해갔다. 이상했다. 몇 년이나 쫓아다니던 효린과 결혼한 지 일 년을 막 넘기고 있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여자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준호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고민 있어?” 준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손에 든 맥주잔만 들여다보며 만지작거렸다. “어디 아파?” “…… 아니.” “그럼 뭔데?” 준호는 반쯤 남은 맥주잔을 비우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혼해야겠다.” 내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뭐라고 했어?” “이혼.” 나는 너무 놀라서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한 상태로 준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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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부장의 풍금 소리단편 2024. 3. 22. 17:47
“현관 비밀번호가 뭐냐고? 잊어먹었다고?” “갑자기 물으니까 나도 생각이 안 나는 데 전화 끊고 조금만 기다려 핸드폰에 저장해 놓았으니까.” 전화를 끊고 오른손으로 턱을 고이고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전화를 걸었다. “81750이야. 알았어.” “누구야?” “아내.” “현관 비밀번호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고 해서……” “오 부장도 생각이 안 난 거야? 바로 안 알려주고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다고 하더니 생각이 난 거야?” “아니. 나도 잊어먹은 것처럼 하느라고.” “아니 뭔 소리야? 바로 알려주지 않고 왜 잊어먹은 척하는데?” “그게 그러니까. 응……, 내가 바로 알려주면 혹시라도 아내가 자기만 그런가 하고 실망할 것 같아서.” “아내를 배려해서 일부러 오 부장도 잊은 척하고 찾아서 알려준다고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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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악마단편 2024. 3. 9. 14:03
“이봐 김 형사, 자네 고소당했네.” 과장한테 불려 갔다 온 반장이 김 형사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던지며 똥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주인이 전세금을 천만 원이나 더 올려달라고 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출근한 후 가뜩이나 심란한 심사를 혼자서 삭이고 있던 김 형사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아닌 밤중에 무슨 봉창 뜯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험한 눈길로 반장을 쏘아보았다. “좀 알아듣게 말씀하시죠?” 김 형사가 시비하듯 말했다. “지난번에 할머니 자전거로 밀어버려 돌아가시게 한 녀석 있지? 그놈이 자네 정신학대로 고소했대.” 김 형사는 누군가 갑자기 등에 얼음물을 쏟아붓는 듯 머리카락이 서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뭐 뭐라고요? 무슨 학대라고요?” 한 달 전이었다. 길에 쓰러진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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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行間)의 오류단편 2024. 3. 9. 13:55
영천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기지개를 켰다. 찌뿌둥한 몸에서 오래된 돌쩌귀가 삐걱거리듯 소리가 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직원들이 어느새 다 퇴근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요즘 MZ 세대들은 참 시크하게 사는구나. 부럽다.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다 퇴근했구나!’ 아파트 문을 열려고 하니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며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차가운 문에 이마를 기댔다. 금속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그 자세로 벨을 눌렀다. 응답이 없다. 다시 한번 눌렀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뒤로 물러나 주머니를 뒤져 스마트폰 꺼내 note에서 비밀번호를 확인했다. ‘7438’ 간첩들의 암호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집에 연주가 없었다. 약간 허기가 느껴져 냉장고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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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거짓말? 이라고단편 2024. 2. 18. 19:32
“뭐 해?” “그냥.” “밥 먹을래?” “그래.” “뭘 먹지?” “만나서 정해.” “‘이모 어서 와’에서 보자.” “메이컵 하고 왔구나. 와!” “뭐 놀랄 일이라고…….” “이모, 여기 브런치 A 둘 그리고 와인 두 잔 주세요.” “소설 읽을래?” “별로.” “왜?” “거짓말이잖아.” “거짓말이라…….” “응.” “드라마 안 보면 큰일 날 듯하면서?” “심심하니까.” “그것도 거짓말이잖아. 영화, 연극, 종교의 일정 부분도 거짓말이고, 너 메이컵 하는 행위도 돋보이기 위한 거짓이잖아.” “하긴 뭐. 거짓 아닌 게 없구나!” “드라마보다 재미있으니까 읽어 봐.” “설마?” “아니면 내가 저녁 살게. “그렇게 자신 있어? 무슨 책인데?” “그 대신 재미있으면 네가 저녁 사야 한다.” “그러지 뭐.” “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