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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태백선 기차산문 2018. 3. 28. 15:49
느림의 미학 태백선 기차
한겨울 태백선 기차를 타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눈 덮인 산과 숲을 보리라 마음 먹었는데 이런저런 일들에 발목이 잡혀 3월이 다 가는 철에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제천 의림지)
태백선은 제천에서 시작되었다. 역에 도착해서 기차시각표를 확인해 보니 인터넷에 나와 있는 것과는 다르다. 강릉역까지 가는기차가 없다고 했다. 정동진까지 가는 기차는 두 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출발한다고 한다. 역과 멀지 않은 곳에 의림지에 들렸다. 삼한 시대의 저수시설인 의림지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봄을 맞으러 나온 사람들이 붐빈다.
(제천역 플랫폼)
14시 41분 열차가 출발했다.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하자 곧바로 쌍룡, 영월을 지나 예미역에 이른다. 예미(禮美)라는 역 이름이 예뻐서 입안에 넣고 사탕처럼 굴려본다. 원래 이름은 여미였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이름이 예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여미(餘美)인지 아니면 여미(麗美)인지 모르겠지만 여미(餘美)가 원래 이름이었기를 바랬다.
이어 민둥산역에 도착했다. 한자 이름은 없고 영문 이름만 있어 궁금했다. 원래는 증산역이었는데 주민들이 마을에 있는 민둥산(나무가 없는 산. '사내도 노인의 시선을 따라 민둥산의 곳곳에 움푹움푹 패어 있는 포탄 자국들을 보았다. '출처 : 송기원, 월행 )으로 바꾸어 달라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 한다. 50-60년대 산들은 거의가 민둥산이었다. 민둥산은 헐벗고 메말랐지만 추억 속에 남아있는 이름은 다정하기만 하다.
기차가 조심스럽게 험한 길을 달린다. 산이 수직벽처럼 깎아지른 좁은 곳을 지나기도 하고 나무들이 홀로 혹은 여럿이 쓰러져서 원시림처럼 보이는 곳을 지난다. 눈이 하얗게 덮여서 군데군데 보이는 자작나무와 함께 세상이 하얗게 보이는 풍경이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쉽다. 자작나무는 아니지만 응달에 잔설이 쌓여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다는 추전역을 지난다. 해발 855 미터라고 하니 웬만한 산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추전(杻田)은 싸리나무골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하늘 아래 첫 역인 추전역은 기차가 서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비록 오르고 내리는 지역 주민은 없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역이라는 호기심과 상징성이 있으니 잠시 정차를 하면 관광객들에게 더욱 즐거운 여행이 될 듯하다.
사북역을 지나면 채용 비리로 이름이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는 강원랜드( 폐광 지역의 경제적 발전과 국가 경쟁력 향상을 목표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내국인의 출입이 허용된 카지노 시설을 비롯한 테마파크를 갖춘 지식경제부 산하 기타 공공기관)가 보인다. 탄광이 없어지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으로 유일하게 내국인 출입이 허용된 카지노라고 한다.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만들어진 강원랜드가 있는 정선 지방의 자살률이 전국의 2배가 넘는다고 하니 경제 살리려고 만든 곳이 사람 잡는 곳이 된 꼴이다.
기차가 조심스럽게 때론 더듬거리며 4시간이 걸려 종착역인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백사장이 일품이기도 하고 드라마 ‘모래시계’로 유명해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가까이에 바다부채길이 있다. 2016년 10월에 문을 열었다. 군사시설이 있는 곳이라서 그때까지는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었다고 한다. 해금강이 연상되는 아름다운 길이다.
정동진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갔다. 저녁을 먹고 안목해변 커피거리로 갔다. 이미 밤이 되어 바다는 검푸른 모습으로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커피쿠퍼(Coffee CUPPER)카페 3층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거리는 환한 불빛으로 빛나고 관광객들의 모습이 활기차다. 밖을 바라보는 사이에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커피가 왔다. 민트향과 여성적인 섬세한 맛이 난다는 예가체프가 강릉의 밤바다와 잘 어울린다. 평판대로 부드럽고 향기롭다. 좀 더 남성적인 맛을 좋아한다면 블루마운틴 커피를 주문해서 마셔보아도 좋을 듯. 커피쿠퍼(Coffee CUPPER)카페에는 블루마운틴 커피도 맛볼 수 있다.
강릉 바다에 새벽 해가 뜬다.
1박 2일의 짧고 느린 여행은 강릉에서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정동진으로 와서, 태백선을 열차를 타고 되돌아오며 유년의 추억을 더듬어 보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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