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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불
    산문 2015. 4. 28. 21:52

     

      혼불 속에 담긴 생

     

       최명희의혼불을 읽으며 아릿하게 느끼는 감동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우리에게도 이런 소설이 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지, 한 문장, 한 쪽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놀라움은 감동으로 이어졌다.

    그간 대하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사실성의 부실한 묘사에 아쉬움을 느끼곤 했는데 혼불을 읽으면서 바로 이거야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천민과 상민 일상의 실감나는 묘사, 전통 장례식에 대한 세세하고 섬세한 기록, 만가, 무당굿에서 부르는 노래, 윷놀이 점, 절 입구 천왕문에 서 있는 천왕에 대한 설명, 일제강점기 상민들의 일상에 대한 표현, 간도로 간 사람들의 생활상 등 이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절절한 우리 과거에 대한 확인이었다. 학교 다닐 때 배운 국사는 왕과 그를 주변으로 하는 양반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도 식민사관에 근거한 패를 갈라 끊임없이 사화를 일으켜 서로 죽이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선조들에 대한 기록이었다.그 밑바탕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상민과 천민들에 대한 모습을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었다물론 전문적으로 국사에 대해서 배웠더라면 알 수도 있었겠지만.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학교 교육에서 배우지 못했던 조상들의 삶의 모습, 국사 교육에서 받았던 갈증들이 혼불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혼불은 사건 중심의 예측불허의 긴박한 긴장감을 주는 소설이 아니어서 그런 기대를 하고 이 소설을 읽는다면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단순한 스토리이지만 거기에 관계되는 일상생활의 세세한 묘사가 다른 소설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가치이고, 우리의 과거를 회상하고 아픔을 생각하게 하는 수준 높은 전문적 지식에 바탕을 둔 대하소설의 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홀했던 과거 백성들에 대한 보고서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혼불을 읽으면 아프다. 작가의 온 몸을 돌아 나온 문장은 언제 읽어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귀기(鬼氣)가 느껴진다. 사금파리에 베인 듯, 꾹 누르면 핏물이 배어나올 것 같다. 동천(冬天)에서 한기가 쏟아지고, 황톳길이 아득히 펼쳐지고, 처연한 노을자락이 들과 마을과 삶을 덮는다. …… 그의 글쓰기는 실로 무서웠다. 사람들은 그를 신들린 작가라 했다. 그 정치(精緻), 치열함, 그 준열함에 몸을 떨었다.

    (최명희와 혼불. 2007.05.19. 여적. 김택근 논설위원)

     

      간도로 간 사람들의 비참하고 처절한 삶의 한 면을 이렇게 쓰고 있다.

     

      부서방은 부엌 바닥에 눕혀진 딸내미 벌건 뺨에다 불문곡직, 부젓가락을 꽂듯이 시커먼 가위 끝을 쑤셔 넣었다.

      아니, 아니, 이런.

      이보시오, 부서방.

      미처 말릴 겨를도 없이 푹, 소리조차 내지 않고 볼을 뚫고 들어간 가위를 힘겹게 벌려 스걱, 스걱, 스걱…… 자르는 것은 살이었다. 얼어서 감각이 없는 볼때기 살은 가위 끝에서 허옇게 부스러지며 잘리었다. 

      아이는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참혹한 전경을 상상도 해 본 일이 없는 강모는 진저리를 쳤다.

     

      이 씨 가문을 일으킨 청암부인의 손자인 강모는 같은 민족이면서도 제 집의 종처럼 살아온 부서방의 이런 현실을 모르고 사는 양반집 도련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만들어준 부를 누리고 살면서도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거나 연민을 가지지 못한, 사촌누이인 강실이와 상피를 붙은(그리하여 강실이의 운명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허약하고 도피적인 인물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거 조상들의 양반과 상민의 벽과 단절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런 갈등과 벽이 훨씬 더 견고해 졌지만.

      일제강점기 상민들은 이중삼중의 힘에 겨운 짐을 짊어지고 지옥 속 불구덩이 같은 삶을 살았다. 양반 집에 붙어서 소작이나 하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던 이들에게 왜놈들은 부역이라는 또 하나의 멍에를 씌운다. 힘들고 어려웠던 당시의 상민의 삶의 모습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집집마다 베 짜는 소리 덜컥 덜커덕 밤이고 낮이고 들렸으나, 그것은 한 올 한 올 고운 날 앉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이 덜컥 덜커덕 내려앉는 소리였으니, 무명삼베비단이 필로 쌓이면 무엇 하겠는가. 짜는 대로 자투리까지 걷어 가는 것을. 밤을 낮 삼아 잠 못 이루고 베를 짜는 것은 오직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만일 할당된 양을 제 기한 안에 짜내지 못하면, 신민(臣民) 정신이 투철하지 못해서 게으른 것이라고, 차마 못 당할 수모와 처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작가가 보여주는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 속에서 이루어낸 장엄한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조각가가 정을 대고 돌을 부수고 깎아내어 완성해가는 조각품처럼 정교하고 섬연한 손놀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글은 그리 쉽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읽을 수 있는 글도 아니다. 혼불이 1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썼는데 소설적인 가치는 물론이고, 우리의 과거 문화사가 잘 씌여진 교과서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폭넓은 전문적인 탐구와 노력이 없이 얄팍하게 머리를 굴려서 쓴 소설과는 그 근본을 달리 하는 이야기다.

     

      소설의 무대가 작가가 살던 남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남원 지방의 사투리 구사가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사투리는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명징하게 들여다보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혼불에 나오는 사투리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의 절절한 기록이 될 것이다. 1947년생인 작가가 비교적 일찍 세상을 뜬 것도 이 작품에 너무 심혈을 쏟다가 건강을 악화시킨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남긴 소설은 소설의 제목처럼 작가의 혼불이 되어 길이 남겨질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다.

     

     

      구례에서 남원으로 가는 국도를 지나다 보면 혼불 문학관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잠시 머물며 그의 치열했던 흔적들을 찾아 혼불이라도 접하고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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