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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녁이 있는 삶
    산문 2015. 5. 3. 21:41

    저녁이 있는 삶

     

      저녁이 있는 삶은 2012년 대선 때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손학규 후보가 내건 선거 구호였다. 그가 내걸었던 구호는 다른 후보들이 내건 구호에 비해서 훨씬 덜 자극적이고 선전의 효과가 떨어지는 미지근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정치적 요인 때문이었는지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했다. 그 후 2014730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지만 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낙선 후 그는 바로 정치에서 떠나겠다고 발표를 했고, 지금 강진 백련사 부근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다.

      그는 정치인 중에서 드물게 영국에 유학해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그가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대학에서 후배를 양성하거나 학문에 정진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는 평소 나름 국민들에게 가까이 다가 위해서 전국을 돌며 포장마차를 하기도 했다. 그 행동이 비록 자신의 정치적 위상과 인지도를 높이려는 계획된 행동이라고 해도, 그렇게 해서라도 국민이게 다가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른 정치인에 비하여 진실이 느껴지는 행보였다. 그가 추구하는 정치는 조용한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질서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아니었을까. 다른 후보들이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정치구호를 내걸고 당선이 되면 입에 침도 마르기 전에 공약을 뒤엎는 전형적인 정치의 행태를 바꾸어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무튼 다른 후보들에 비해서 소박한 구호 그렇지만 꼭 필요한 저녁이 있는 삶을 국민들에게 주려고 했던 그는 좌절했고 지금 칩거 중이다.

     

      우리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어떤 의미일까. 텔레비전, 라디오, 전기, 전화 같은 문명의 이기가 없었던 시절 거기엔 분명히 저녁이 있는 삶이 있었다. 남자들은 사랑방에서, 여자들은 안방에 모여 일도 하고, 일이 없는 겨울 어느 날에는 막걸리를 나누고 혹은 고구마를 삶아놓고 등잔불에 아른거리는 얼굴들이 빙 둘러앉아 하루의 일과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누구네 제사나 잔치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서로 품앗이를 하듯 대사를 치를 적에 자기 형편에 맞게 부조를 했는데 될 수 있으면 서로 겹치지 않도록 조정하는 일도 이때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연실 네는 막걸리. 영수 집은 팥죽, 민규 네는 떡 이런 식으로 나누어 부조가 겹치지 않도록 조정을 하기도 했고, 남자들은 누구 집이 농사를 가장 잘 있어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서울이나 도시에 출타했다가 돌아오면 그 사람에게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모둠살이에서는 저녁이 있었다. 또 어떤 총각이 윗마을 어떤 처녀를 좋아해서 연애(그때는 데이트를 그렇게 불렀다)를 하는 걸 보았다니, 철수 네 소가 송아지를 낳았고, 쬐그만 네 복실이가 강아지를 여섯 마리나 낳아다는 등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일이 끝난 저녁 마실에서 전해지고 때론 부풀려지기도 했다. 저녁은 공동체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지금처럼 소비와 유흥의 시간이 아니었다

     

      또 시어머니의 기침소리만 들어도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몸 상태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고뿔이 걸렸는지, 아니면 심기가 불편한지, 생선이 먹고 싶은지 마른 기침소리에 담겨진 그 의미심장한 내면들을 용하게도 알아차리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가족 공동체의 끈끈한 가정생활과 들에서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상들에서 수많은 경험과 관찰을 통하여 터득한 경지였다. 거기에는 늘 저녁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손자들이 겸상을 하여 저녁을 먹으며 손자들은 알게 모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처신 방법을 익혔고, 어른들에 대한 공경과 예의범절을 익혔다. 할아버지라는 절대 권력 아래 줄줄이 이어지는 가족의 유대감과 질서 그리고 가족 사랑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저녁이면 손자들을 불러 앉히고 하늘 천 따 지를 가르치는 할아버지와 화롯불에 군밤을 구워주며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전설처럼 살아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면 핵가족화 되어버린 지금, 저녁이 있는 삶은 어떤 식으로 정립되어야 하는 걸까. 아이들은 학원으로, 남편은 근무의 연장인 회식, 엄마 역시 직장을 가진 사람이 많고, 직장이 없는 엄마들은 친구들과 좀 더 맛있는 음식이나 명품을 찾아 몰려다니는 복잡하고 난해한 현실에서 과연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나 있는 걸까.

     

      옛날에는 하는 일이 같고, 열린 공간에서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하며 살았고, 어른이나 아이나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이 거의 없었기에 공동의 관심사 즉 가족 간이나 어른 사이에 그다지 대화의 단절이 심하지 않았다. 단순한 일과 공동의 이야깃거리를 가진 삶의 방식에서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은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는 일이 다양하고, 남자와 여자가 가지는 흥미나 관심이 다르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세계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되어버렸다. 부모나 아이들이나 젖은 솜처럼 피곤에 지쳐 들어온 집은 가족이 다정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고, 각자가 알아서 피곤을 푸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엄마는 드라마 속 훈남들을 환상과 상상의 연인으로 만들어 환의 세계 속에서 헤매다가 잠이 들고, 아버지는 모바일이나 웹에서 걸 그룹들의 미끈한 몸매에 눈독을 들이다가 내시처럼 시들어버린 젊음에 대한 자괴감으로 끙끙거리다가 잠이 들고, 아이들은 온종일 용량이 넘치게 공부한 머리를 전자오락으로 식히는 상황에서 저녁이 있는 삶은 꿈이 아닐까.

     

      이제 저녁이 있는 삶을 회복하는 일은 천지개벽만큼이나 어려운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손학규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도 그가 생각한 저녁이 있는 삶은 각기 다른 일상과 관심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거대하고 견고한 난제였음에 틀림없다. 심한 심리적 타격을 입은 그가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는 좀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부엌도 없는 오두막이나 다름없는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를 보며 생각한다. 저녁이 있는 삶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에서 그런 명제를 걸고 대통령이 되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그나마 정치인에게 한 가닥 희망을 갖는다. 불가능한 꿈을 잠시나마 꿀 수 있게 해준 그가 귀양살이 하듯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은 어쩌면 현대사회 비극의 한 단면으로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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