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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여행 낙안읍성 민속마을
    그곳에 가면 2020. 3. 19. 11:48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

     

     

         사람들이 모듬살이를 시작하며 집을 짓고 살아온 방식은 그 집단의 지혜와 슬기가 담겨져 있는 문화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환경과 삶의 방식에 따라 자신들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데, 건조하고 추운 혹한의 겨울과 고온 다습한 여름철에 알맞은 집을 짓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순천국가정원에서 일몰)


    (순천국가정원에서  억새와 호롱불)



    (순천국가정원에서 쓸쓸한 풍경)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곳에 터를 잡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구해서 집을 지었다. 조상들은 수천 년 동안 살아오면서 터득한 방식이 초가와 기와집이라는 주거 문화였다. 서민들은 돈이 덜 드는 짚, 나무, 흙을 사용한 초가를, 생활에 여유가 있었던 양반들은 짚 대신 기와를 지붕에 얹는 집을 짓고 사는 전통이 이어져 왔다.

    그 전통은 왕권이 무너진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져 내려왔다. 왕권에서나 일제강점기에서나 백성들의 삶의 방식은 별반 달라질 게 없었다. 못 먹고 못 사는 고달픈 삶을 살기는 왕정이나 일제강점기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왕정에서 양반들에게 시달리고 일제 치하에서 왜놈들에게 시달리다보니 생활방식을 바꾸지 못하고 조상에게 물려받은 그대로 대물림하며 살았을 뿐이었다.

        



    (산등성이와 초가지붕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렇게 어렵게 생활하던 이 땅의 백성들에게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박정희 정권에서였다. 가난의 대물림이 지긋지긋했던 백성들에게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엄청난 실천 동기를 부여했다. 좁은 골목길을 넓히거나 농로를 만들기 위해 너나없이 자신의 땅을 내놓았다. 당시의 정책 중에서 잘된 것도 많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가장 최악의 정책은 주거 문화의 개선이었다. 초가집과 토담이 마치 가난의 원조인양 몰아 부치며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토담을 헐어내는 일에 신바람을 냈다.

      


    (격자무늬 문살 앞에 낡은 발동기의 모습)


       초가를 한 순간에 없애버린 박정희 정권은 시범 주택이라는 걸 만들어서 시범 마을을 정하여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집을 헐어냈다. 거기에 우리 자연환경이나 기후와 전혀 맞지 않는 슬레이트, 여유가 있는 사람은 시멘트로 평평하게 지붕을 만든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후 슬레이트는 암을 일으키는 물질로 판명이 되었고, 시멘트로 만든 평평한 지붕은 장마에 물이 새거나 스며드는 불편함을 초래하였다.

        



    (삶의 모습은 위대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것)


     (대나무로 만든 대문과 찻집이라니!)


       문제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일부처럼 편안해 보이는 마을들이 주변의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흉물스런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다. 두리뭉실한 산등성이가 만들어 내는 부드러움이 초가나 기와집과 어울려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시멘트로 지은 집은 우리 산천과 어울리지 않았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곡선이 사각형의 각지고 뻣뻣한 직선이 부조화를 이루며 여유와 편안함은 사라진데다, 원색으로 페인트칠을 한 지붕이 국적 불명의 모습으로 어색하게 들어서고 말았다.

     

    ( 외할머니 집 같은 민박집)


       편안한 곡선에서 자아내는 정취가 마을로 들어서면 어머니의 품처럼 다정스럽고 따스한 느낌으로 다가오곤 했다. 동구 밖 늙은 팽나무 사이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와 싱겁게 짖어대던 누렁이의 한가로움, 홰를 치며 때를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 여름 한낮의 매미소리, 풀 먹인 이불 홑청을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다듬이질을 할 때 들리던 소리, 겨울철 눈 내리는 소리도 들릴 것 같던 얇은 문종이의 숨 쉬는 소리 등 어느 것 하나 부드럽고 포근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마당에 깔린 자갈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관광지라고 하더라도 허락없이 들거가면 민폐)


       그런 익숙한 풍경을 낯선 살풍경으로 만들어 버린 조상들을 둔 후손들의 마음이 안타깝다 못해 억울한 마음까지 드는 걸 나이가 먹어가면서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우리 후손들이 우리 전통 집에 대한 체험이 없으니 우리 민족의 정체성도 알 리가 없다. 지금 보이는 모습이 자신의 것으로 굳어질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것을 잃어버린 불행한 세대로 되어 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미를 사랑하고 그걸 탈취해 가는 일본인들을 경계한 야나기 무데요시도 우리 집들이 만들어 내는 곡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의 수도를 방문하여 남산에 올라가 그 시가를 바라보기로 하자. 눈에 띄는 것은 그 집들의 지붕에 나타나는 한없는 곡선의 물결이 아닌가. 만약 이 원칙을 깨뜨리고 그 가운데 직선의 지붕이 보인다면 이것은 일본이나 또는 서양의 건축이라고 단언해도 좋다. 곡선의 물결은 움직이는 마음의 상징이다.’

     (조선과 그 예술 93쪽 야나기 무데요시)

     


    (소박하고 신산하게 살았던 조상의 삶이 보이는 집)


       이처럼 외국인에게도 우리나라의 초가와 기와지붕에서 그려내는 곡선에 감동을 받고 있다. 최근에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의 전문 건축가들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는 것은 안동 민속마을이나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초가집이라고 한다.

        


    (뙤창문'왼쪽 두 번 째 작은 문' 이 보이는 서당) 


       낙안읍성은 초가가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정겨운 곳이다. 단순히 관광 목적으로 지은 게 아니라 이백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거기에 가면 우리가 잃어버린 조상들의 숨결과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어린 시절 초가가 들어선 시골집에서 자란 경험이 있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추억의 장소이다.

        


    (풍구과 수차)

    (곡식을 담던 가마니를 짜던 가마니 틀)

    (페달을 밟아 곡식을 훑던 탈곡기)

     (벼가 자란 논에 풀을 제거하던 제초기)


       이엉과 용마름을 엮어보거나 지켜보고, 늦은 가을 퇴색한 헌 나래를 한 꺼풀 벗겨내고 새로 엮은 이엉으로 지붕을 덮고 굵은 새끼로 촘촘히 엮는 걸 경험한 사람만이 낙안읍성에 가면 예전 고향 마을의 다정하고 푸근한 정취를 맛볼 수 있다. 겨울이면 처마 밑에 작은 구멍을 내고 보금자리를 마련한 참새를 잡으려고 손을 넣어 팔딱이는 새의 숨결을 느낀 사람, 눈이 녹아내리며 굵은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리는 걸 따 먹어본 사람, 문풍지가 바람에 떠는 소리를 들으며 무명 이불 속에서 구들의 따뜻함을 느껴본 사람, 집집마다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산 아래 작은 마을 고샅길에서 굴렁쇠를 굴려본 사람, 창호지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을 보며 외로움을 느껴본 사람, 세찬 바람에 날린 작은 빗방울이 방안까지 날아드는 걸 느껴본 사람, 눈 내린 마당에 덫을 놓고 숨소리를 죽이며 뙤창문을 빼꼼히 열어놓고 참새를 기다리던 추억이 있는 사람, 군불을 지피려고 아궁이에 장작을 피우며 고구마를 구워먹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가면 옛날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정을 꾹꾹 눌러쓰던 추억의 편지가 생각나는 우체통) 


       그리하여 어리 속에 든 암탉과 병아리를 눈여겨보고, 망태기 속에 갓 낳은 계란도 주인 몰래 만져보고, 떡을 만드는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며 고소한 고명이 묻은 따뜻한 인절미를 먹어도 보고, 굴속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토끼에게 먹이도 주어보고, 돌을 촘촘하게 쌓아올린 정겨운 돌담길을 거르며 우리의 정체성을 느낀다면 좋은 여행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장금 촬영지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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