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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편지산문 2022. 2. 13. 12:50
우리에게도 이런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대한민국,
살아남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연일 제 가족과 측근들에 대한 의혹으로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몰랐다고, 모함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냐고 따져 묻지도 않겠습니다.
'노무현'답게 하겠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누구든 벌을 받아야 하며,
전직 대통령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이제 제가 할 선택으로 상처받을 이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어떤 꾸중과 질책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 서운하고 노여운 마음,
부디 저의 마지막 진심을 담은 이 편지로
조금이라도 달래지기를 빕니다.
-누군가 저의 인생을 '싸움'이라는 한마디로 정의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정말로,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정치인이 되기 전 인간 '노무현'의 삶도 그랬습니다.
-그 최초의 상대는 '가난'이라는 녀석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은 단지 불편한게 아니라,
사람을 비겁하고 치졸하게 만드는 고약한 놈이었습니다.
-어쩌다 먹을거리가 하나 생기면, 형제들이 볼새라
저만의 비밀 장소에 감춰두고 먹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옳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너무나 배가 고파 나눠 먹을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집이 풍족하여, 화기애애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눠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 저의 꿈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가난과의 긴 싸움을 끝냈을 때,
저는 어느새 처자식을 거느린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무 전문변호사로 돈을 좀 만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제 아이들이 어린 날의 저처럼 먹을걸 숨겨두고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양보해라, 나눠 먹어라, 힘주어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성공한 사람들과 어울려 요트도 타고 멋도 좀 부렸습니다.
-안사람은 그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종종 추억하곤 합니다.
-정말로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것 같았습니다.
-그 행복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나이가 되도록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눈앞에서 나와 내 가족의 목을 죄는 가난과 싸우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몸은 풍요와 여유에 취해갔지만,
눈에는 자꾸 그런 것들이 밟히기 시작했습니다.
-곧, 세상엔 수없이 많은.. ‘노무현’들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죽어라 이 악물고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먹을걸 숨길 수 밖에 없는 건.. 예전의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럴까.
왜 나라는 성장하는데, 가난한 이들은 왜 학교에조차 갈수 없는
가난을 자식에게까지 대물림하게 되는가.
-점차 사회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경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왜곡된 역사가, 도처에 널린 반칙과 특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늦은 깨달음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들을 외면하고,
저 혼자 소시민적 행복을 느끼며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저의 삶은 아시는 대로입니다.
-인권변호사가 되었고, 국회의원이 되었고,
청문회에 나가 이름도 얻었고, 그리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늘 예전의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돈이 없고 힘이 없어 세상으로부터 매맞고 짓밟히는 이들
편에 서고자 했습니다.
-그 눈물을 멈추게 할 힘이 내게 없다면,
최소한 내 손등으로 닦아주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들 ‘대세’니 ‘주류’니 하는 것에 우루루 몰려갈 때, 원칙을 지키며 버티려 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비웃음 살때도,
그 바위가 잘못된 것이라면 내 몸이 박살나더라도
부딪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그 바위가 잘못되었다는 표시라도 나지 않겠습니까.
-저를 굉장한 '싸움꾼'처럼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겁도 많고 무서운 것도 많은,
그런 보통 사람입니다.
-'3당합당'에 반대하고 '재야의 길'을 선택하며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따논 당상이라던 '종로'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갈 때도,
대통령 당선 확정을 통보받고도, 다리가 떨려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할만큼 두려웠습니다.
-제가 대담한 강골이었다면 안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겁이 나도, 그런 선택들을 한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힘 없다고 짓밟히지 않는 세상,
한번 가난하면 죽을 때까지 가난한 게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면
일어날 수 있는 세상,
명백한 부정에 타협하고 고개 숙여야 살아남는 세상이 아니라
개인의 양심에 따라 '이의 있습니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세상에
내 아이들을 살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저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신 국민의 뜻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노무현은 짓밟혀도 됩니다. 무너져도 됩니다.
-하지만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과,
그들이 꾼 꿈은 짓밟히고 무너져선, 안 됩니다.
-그 꿈은 이 나라의 미래입니다.
-우리의 아이들 뿐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 살아가야할 나라입니다.
-언제까지 대결과 분열을 가르칠 것입니까.
-언제까지 증오와 반목을 가르칠 것입니까.
-언제까지 특권과 반칙을 가르칠 것입니까.
-사실은 모두가 불안하고, 또 불행하지 않습니까.
-할아버지가 된지 오래지 않습니다.
-- 자식들보다 더 귀엽습니다.
-그애들이 자라나고 시집도 가는 걸 왜 보고싶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저는, 늘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해 왔습니다.
-변호사 시절의 안락한 삶보다
눈 앞의 부조리에 맞서는 것이,
국회의원 한번 더 하는 것보다..
지역주의 보스정치에 저항하는 것이,
-대통령 되는 것보다 원칙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 2002년, 저와 여러분이 함께 꾸었던 꿈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키는 건.. 이 길 뿐입니다.
-너무 슬퍼하거나 미안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의 운명입니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습니까.
- 이제 작별인사 하겠습니다.
-- 대통령이었음보다,
이 아름다운 나라의 국민이었음이
더 큰 영광이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2009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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