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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과 시
    2022. 11. 20. 17:10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11

                                         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맞은 어린 장미 한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가을의 끝

                                             릴케

    언제부턴가 나는 모든 것이
    변하여 가는 것을 보아 온다
    일어서서 행동하고,
    죽이고, 서럽게 하는 것들을

    흐르는 시간의 사이사이에
    정원들은 어느덧 모습이 달라진다
    노랗게 물든던 정원의
    누렇게 되어 비린 서서한 황페
    길은 정말 멀기도 하였다

    지금 텅 빈 정원에서
    가로수길 너머로 바라다보면
    엄숙히 드리운 닫힌 하늘을
    아득히 먼 바다 끝까지
    거의 볼 수가 있다

     

     

                   단풍나무 한 그루

                                                        안도현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겠다고

    가을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아래서

                                                 이해인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도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기도가 되는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면 행복합니다

    별을 닳은 단풍잎들의

    황홀한 웃음에 취해

    남은 세월 모두가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단풍

                                               유치환

     

    신이 주신

    마지막 황금의 가사를 입고

    마을 뒤 언덕 위에 호올로 남아 서서

    드디어 다한 영광을 노래하는

    한 그루 미루나무

     

     

     

                  가을비 소리

                                               서정주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

    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

    뼈다귀 속까지 울리는구나

    저승에 계신 아버지 생각하며

    내가 듣고 있는 가을비 소리

    손톱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아버지 귀신과 둘이서 듣는

    단풍에 가을비 가을비 소리!

     

     

               단풍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혹은 가슴앓이

                                          이민우

     

    가슴앓이를 하는 게야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대낮부터

    낮 술에 취할 리가 없지

    삭이지 못한

    가슴 속 붉은 반점

    석양으로 타오르다 마침내

    마침내 노을이 되었구나

    활활 타올라라

    마지막 한 잎까지

    아쉬워 아쉬워 고개 떨구기엔

    가을의 눈빛이 너무 뜨겁다

     

     

    단풍

                                        이명희

     

    온 몸이

    전율토록

    그렇게

    짜릿했다

    터질 듯

    가슴 터질 듯

    그렇게

    황홀했다

    찰라에

    영혼을 담아

    죽어도 좋을

    그 순간.

     

     

                  가을날

                                         노혜경

     

    오늘 하루는 배가 고파서

    저녁 들판에 나아가 길게 누웠다

    왜 나는 개미가 되지 못했을까

    내가 조금만 더 가난했다면

    허리가 길고 먹을 것밖에는 기쁨이 없는

    까맣고 반짝거리는 벌레였다면

    하루 종일이 얼마나 행복할까 먹는 일 말고는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일이 없다면

     

                     가을 엽서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나눠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동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을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노을

                                                    이병천

     

    서산 노을이 환장하게 곱다

     

    저 너머 연인들은

    아직 헤어지지 않았으리라

     

     

                              몽정

                                                  박철웅

     

    꽃밭 사이를 걷고 있는데요

    단풍잎 하나 똬리를 틀더니

    입술에 착 달라붙는 거 아니겠어요

    물안개 스쳐가듯 아른하고요

    한 줄기 소낙비 지나가듯 시원하고요

    참기름 향처럼 고소한데요

    안개꽃 나른하게 피어나는 거예요

     

    잎새주 한 잔 한 잔 건네주고 건네받는데요

    잎새에 입술이 얹혀 바르르 떠는데요

    눈동자에 낙엽지는 오솔길이 열리고요

    단풍잎 틈새로 농익은 입술도 바르르

    떠는 게 아니겠어요

    그 뒤는 상상에 맡기겠지만

     

     

             청단풍

                                         회색갈피

     

    폭우처럼 격렬했던 사랑

    잊혀진 자리

    검버섯 돋고

    앙다문 입술 틈으로

    번지는 허망한 정념

    붉은 잎들로 타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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