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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계산 천자암 얼레지꽃
    그곳에 가면 2024. 3. 28. 14:10

     

    선암사 뒷산으로 얼레지꽃을 보러 갔는데 한 포기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서 기왕 나선 김에 보고 가야겠다는

    마음이 더 간절해서 천자암으로 갔다. 천자암도 간 지가

    십 년이 넘은 듯하다. 천자암 가까이 가서 예전에 보았던

    주자장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오르니 경사가

    심해서 숨이 찬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바위에 앉았더니

    바로 앞에 작고 파란 꽃을 앙증스럽게 피운 현호색이

    보인다. 조금 더 오르자 이번에는 민들레꽃과 비슷한

    복수초가 노랗고 선명한 꽃을 피운 채 홀로 서 있다.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는 사람만 보라는 선물 같았다.

     (현호색)

     (복수초)

     

     

     

    천자암 왼쪽 길로 걸어가며 얼레지꽃이 있는지 두리번

    거렸는데 딱 한 포기 얼레지꽃이 있는데, 이미 시들어가고

    있었다. 십여 년 전에 왔을 때는 주변에 얼레지꽃 군락지가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천자암으로 발길을 돌려 먼저

    수령 칠백 년이 넘었다는 쌍향수 앞으로 갔다. 높이 25m,

    둘레 3.98m인 곱향나무를 잡고 흔들면 극락세계로 간다고

    하는데 지은 죄가 많아서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옆 산으로

    갔다. 드디어 얼레지꽃이 보인다. 선암사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살 수 없어 외딴 천자암 곁으로 왔다는 듯이

    바람에 꽃잎이 흔들리며 막 피어나는 얼레지, 날개를 활짝 펼친

    제비처럼 꽃잎을 뒤로 제치고 꽃술을 부끄럼도 없이

    자랑하는 얼레지도 있다. 이 모습을 보려고 먼 길을 왔다.

     

    예전에 비해 얼레지꽃 군락과 개체는 현저하게 줄어들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몇 년 후에 다시 왔을 때

    얼레지꽃을 볼 수 있을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레지

                                                  김선우

     

    옛 애인이 한 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만만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짓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모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바람 소리, 물소리, 목탁 소리, 염불 소리가 천자암을

    맴돈다)

     

     

     얼레지꽃

                                   회색갈피

     

    호젓한 선암사 숲길

    고혹의 춤사위

    여민 저고리 밑

    살짝 드러나는

    속세의 징표

    고깔 속 뜨거운 열정

    고행으로 억누른 흔적

    말끔히 지우지 못한 채

    삭발한 머리 위로

    쏟아지는 고뇌

    삼백마흔여덟 계보다

    버거운 인연

    행여

    스칠 수 있을까

    선암사 사람 오가는, 많은.

    바위틈

    나른하게 젖어 드는

    보라빛 애욕

    어둑새벽

    전율하는 법고 소리

    텅 빈 법당

    백팔 배로 부족해

    땀에 젖은 승복

    합장하고 엎드려도

    승과 속의 경계를 넘지 못한

    번뇌

    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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