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봄 그리고 부유
    새와 나무 2018. 4. 30. 13:07


      

    봄 그리고 부유

     

     

        

           겹겹이 쌓아올린 아파트의 한 틈에서 고단하고 희미하게 숨소리를 이어가노라면 콘크리트와 전자파의 건조한 분진들로 미세한 세포까지 북어포처럼 말라 가는 듯하다. 세월은 언제까지나 내 곁에서 머무를 것이라는 젊은 날의 자만은 송두리째 잘려나가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 몸에서는 물 오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딱딱하게 굳어 균열하는 피부가 존재의 가치를 부정하듯 덩그마니 드러난다.  


       몸 속속들이 그리고 감성까지 메말라가며 삶의 켜들이 뭉텅뭉텅 일어나 떨어져 나간다. 돌보는 이 없는 시골집의 흙벽이 군데군데 허물어져 내리듯이……. 그런 감정들이 죽순처럼 치밀고 올라오면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어 놓고 푸석푸석 일어나는 감정의 분진을 씻어내려 본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망막하게 서 있던 활엽수 가지 끝에서 미세한 연두색이 푸릇푸릇 돋아나기 시작한다. 석양 뒤로 막 채워지는 푸른 이내 속에서 깜박이는 등불이 살아나듯 여린 생명들이 가만가만 옹알이를 시작하는 듯하다.


       일상에 쫓기다가 눈을 들어보면 산이 연두색으로 덮여간다. 수면 위에 파문이 일며 휘어진 폐곡선처럼 군데군데 소용돌이가 번져가듯……. 어둠을 밀어내는 순수한 빛이 아름다운 첫 새벽 비상을 꿈꾸는 물고기의 윤기로 다가서는 봄은 내게 감당하기 어려운 갈증을 가져다준다.

     

      딱딱한 수피(樹皮)를 뚫고 목질부로 적셔오는 비바람처럼 내밀한 피돌기로 틈입하는 봄기운으로 이미 생명에 대한 연민을 상실한 내 몸은 기어이 그것들의 포로가 되고 만다. 바위와 굳은 땅을 밀어내며 치솟는 생명의 기운이 내 몸 구석구석으로 날카롭게 틈입해 들어온다. 그것이 스치고 지나가는 곳마다 구멍이 숭숭 뚫린다. 그 구멍 사이로 털을 곧추세운 들짐승의 날카로운 이빨 같은 화사함이 번뜩이고, 때론 날카로운 이빨에 찢겨나간 푸석한 살에서 피가 아닌 신음 소리가 들린다. 명징스런 색깔로 무장한 진달래와 산벚꽃을 실은 꽃수레가 다가오면 골다공증에 걸린 듯 기름기 없는 정념들이 중심을 잃고 파편처럼 부서진다. 몇 번 더 부드러움 속에 감추어진 매캐하고 싸한 바람이 할퀴고 지나가면 난 기어이 으슬으슬 한기를 느끼며 자리에 눕고 만다 아스피린을 삼키고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흥건히 땀을 쏟아야 한다. 무겁게 부유하는 몸에서 빨래를 쥐어짜듯 수분을 뱉어내고서야 겨우 한기를 이길 수 있다. 땀에 범벅이 되어 뒤척이노라면 내 몸 어느 구석에서 봄바람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한다.


       그때쯤 산에는 진달래와 산벚꽃이 지고 부쩍부쩍 새순이 돋는다. 새순이 꿈틀거리는 숲의 중심 속으로 홀린 듯 발걸음을 옮기노라면 숭숭 뚫린 구멍이 연두색으로 채워지는 듯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초록으로 덮여 가는 숲길로 천천히 천착해 들어가며 초록은 동색이 아닌 개성으로 태어나는 생명의 자기 표현임을 인식하게 된다. 봄은 비록 내게 설렘을 주지 못하고, 허물어져 가는 삶에 대한 회한만을 줄지라도 초록으로 번져 가는 숲을 외면하지 않으며 그냥 바라 것만으로 위안을 삼으며 살 수 있을 것도 같다.


    '새와 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명의 대물림  (0) 2018.08.27
    양심적 병역 거부  (0) 2018.05.15
    옹기와 삶  (0) 2018.04.16
    고향 마을의 겨울   (0) 2018.03.27
    황진이와 마돈나  (0) 2018.03.27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