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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이 피기까지는 일부 김영랑)
영랑의 생가에 들어서기 전 먼저 만나는 것은 화강암을 연마하여 검게 만든 표면에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비가 왼쪽으로 서 있다.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사진(19쪽)을 보면 시비가 집안에 보인다. 유홍준은 그 시비를 ‘육중하고 촌스러운 자태로 이 집의 운치를 다 망쳐놓았다’고 썼었는데, 지금은 시비가 집 입구 왼쪽으로 있는데 그 모양이 사진과 판이하게 다르다. 새로 만든 것인지 옮기면서 개비(改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비를 보고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행랑채가 있다. 헛간과 광 그리고 하인들이나 살았음직한 방이 있다. 이 건물은 안채 아래 낮은 곳에서 안채를 모시듯이 자리하고 있다. 행랑채 끝에는 모란을 심은 작은 화단이 있고, 그 옆에는 샘이 있다. 안채에 가까이 가면 시선을 끄는 것은 안채 왼쪽으로 있는 툇마루이다. 위세를 떨치던 대갓집에나 있을 것 같은 제법 운치 있는 툇마루가 초가집인 영랑의 안채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조금은 이색적이다. 영랑의 가문이 대지주였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집 오른쪽으로는 ‘장광에 감잎 날아와’라는 시구(詩句)를 연상시켜주는 작은 장광이 있다. 그 위 대밭이 있는데 바람이 없어 댓잎의 서걱이는 소리는 들을 수 없고, 늙은 동백나무들이 꽃봉오리를 간직하고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고 있다. 모란은 막 깊은 잠에 빠진 듯하고…….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고 노래한 영랑의 시구를 유홍준은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서정의 발현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리하고 맥 빠질 수 있겠는가? 모란이 피기까지 그가 기다린다는 것은 고작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그런 식의 정서발현이란 감정의 과소비밖에 안될 것이니, 클리넥스 홑껍질보다도 근수가 덜 나갈 이 가벼움을 티 없이 맑다고 표현하기는 싫다.(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8쪽)
유홍준 교수는 어떻게 표현하기를 바랐을까. ‘뜨거운 환희의 봄’이었을까 아니면 ‘납덩이처럼 무거운 봄’이었을까. 영랑이 3.1운동과 관련하여 6개월이나 옥살이를 했을 만큼 민족의 아픔을 행동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사람이다. 또한 ‘독을 차고’ 같은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시도 썼던 영랑이다. 그가 겪은 좌절과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다고 한 것이 클리넥스 홑껍질보다 가볍다고 말한 것은 지나친 독선적 해석이고, 시에 대한 깊이를 평가 절하한 오만함라고 할까.
‘찬란한 슬픔의 봄’ 속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본다. (이런 표현을 형용모순이라고 한단다. 하지만 시에서는 이런 형용모순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찬란한 것과 슬픈 것이 이중적인 대립 관계에 있다. 아름답고 화려한 어쩌면 나른하기까지 한 봄이지만, 조국의 광복을 향한 행동과 염원에도 암울하기만 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절망감을 그렇게 표현했다고 본다.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환희의 봄과 현실적 봄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의 아픔을 대립된 두 낱말이 이 시의 모란에 대한 이미지, 화려하지만 향기가 없는 어쩐지 슬픈 아름다움이, 그가 가볍다고 본 이 시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벼운 것은 그 시구가 아니라 홑 화장지 같은 그의 시에 대한 생각이 아닐까. 클리넥스에는 알맹이도 없는데 홑껍질이라니.
민중시, 순수시, 상징시, 리얼리즘 시 등에서 ‘어느 것이 좋은 시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듯이 읽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좋으면 좋은 시고, 느낌이 와 닿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시가 아닐까. 독자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 느낄 따름이지 그렇게까지 깎아 내릴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김현의 ‘좋은 시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자기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모순을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는 시를 좋은 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서 판단한다면 ‘모란이 피기까지는’ 영랑의 아픔과 삶의 모순이 잘 드러난 좋은 시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안채를 오른쪽으로 돌면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안에는 시를 쓰는 영랑의 마네킹이 있다. 사람은 가고 체온 없는 가짜 형상이 사랑채를 지키고 있다. 영랑은 이 사랑채에서 산고를 겪으며 거의 모든 시를 썼다고 한다. 사랑채 앞 화단이 제법 운치가 있다. 적당한 키의 소나무 한 그루가 멋스럽게 굽어졌는데 솔잎 사이로 보이는 안채가 정갈하다. 바로 옆에 멀쑥하게 키가 큰 종려 한 그루가 싱겁다.
사랑채 옆에는 모란이 잔뜩 들어선 화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 모란에 대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보이는 게 모란이다. 사랑채 옆, 안채 툇마루 옆, 장광 옆에도 모란이 심어져 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같지 못하다는 말을 여기서 생각하게 된다. 모란이 영랑의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온 집안을 모란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심어놓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누가 보아도 어색한 풍경이다.
영랑의 집 둘레는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영랑의 집 돌담에는 담쟁이가 뻗어가던 손길을 멈추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만추의 추색도 이미 다 저버리고 외롭게 남은 담쟁이 넝쿨만이 쓸쓸해서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의 정취는 느낄 수 없다. 그런 정취를 느끼려면 따뜻한 봄날 돌담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음이 오는 그런 날 와야 될 듯하다.
영랑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옥살이까지 한 사람이지만 그 속내는 감성적으로 부드러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절망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당시의 현실에서도, 좌절된 독립에 대한 열패감에도 그의 시는 토속적이고 서정적이다. 현실의 아픔을 견디며 서정적인 시를 흔들림 없이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순수시를 쓰며 친일도 마다하지 않던 미당 같은 시인에 비교한다면 영랑은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때문에 서정적이고 토속적인 그의 시는 현실과 이상에서 고민하는 아픔을 곰삭이는 산고를 겪으며 써낸 작품들이며 그래서 그의 시는 가볍지 않은 아름다운 시라고 생각한다.
영랑 생가를 찾아갔을 때가 십 년이 넘었다. 위 글은 그 때 쓴 글이다. 모란의 계절인 5월, 지금 거기에는 모란이 화려한 자태로 피어 있을 듯하다. 모란이 피었을 때 영랑의 생가를 방문하여 ‘모란이 피기까지’를 중얼거리며 집 주위를 돌면 그 시의 느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영랑 생가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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