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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야 새야 파랑새야그곳에 가면 2015. 5. 13. 14:56
전봉준 생가에 서서
전라도 땅 고부 들판 한 가운데 전봉준의 생가 앞에 섰다. 초가 네 칸짜리 집과 헛간으로 쓰였던 아래채가 덩그마니 자리하고 있다. 옛날에 우리가 살았던 초가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단정해서 시골집 같지 않다. 사람이 살지 않고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해 기념으로 지은 집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갑오년(1894년) 당시 전봉준이 살던 집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는 힘든 일일 것이다. 다만 그가 살았던 집에 서서 당시 백성들의 삶을 반추해 보고, 농민 일만여 명이 봉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적 아픔을 잠시라도 생각하는 것으로 의미를 찾으면 될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이미 임지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경제 기반과 열강들의 압박으로 인하여, 정치적 현실은 백성의 행복을 추구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벼슬아치들의 온갖 탐악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이판사판의 막다른 골목에 세상이 뒤바뀌기를 원하고 있었다. 나라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전라도는 당시 국가의 재정을 유지하는 마지막 보루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횡행하는 매관매직으로 인하여 일 년에도 몇 차례씩 수령들이 바뀌었다고 한다. 벼슬아치들은 온갖 명목의 세금을 만들어 그렇지 않아도 가뭄으로 시달리는 백성들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이 사익을 채우기 위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동진강 원래의 보 밑에 새로운 만석보(萬石洑)를 백성들을 동원하여 만들고, 가을에 수세를 징수하자 그렇지 않아도 각종 세금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이것이 동학혁명의 발단이었다.
동학혁명의 한 중심에서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생가 마루에 앉아 치열했던 그 날의 울분, 분노를 떠올려 본다.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던 개벽의 간절한 소망과 비원도 생각해 본다.
전봉준은 거사하기 전 4개의 행동 강령을 선포하였다.
첫째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둘째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셋째 왜이(倭夷)를 축멸(逐滅)하여 성도(聖道)를 밝힐 것.
넷째 병(兵)을 몰아 서울로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할 것.(한우근 동학 농민 봉기 172)
전봉준은 각처에 통문을 보냈는데 첫 구절은 ‘우리가 의(義)를 내세워 이에 이르나, 그 본의는 단연코 다른데 있지 않고 창생(蒼生)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자 함이다.’라고 밝히고 있다.(같은 책 172)
전봉준은 종단적(宗團的), 포접제적(包接制的) 조직의 뿌리를 가지고 갑오년에 임한 것이 아니고 그 개인적인 인물의 크기, 인물의 됨됨이에 따라 손화중 등에 의해서 영도자로서 앞세워지고 추대되었다고 한다.(김지하 동학이야기 115)
전봉준은 요즘 말로 계보나 학연․지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인품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농민들에게 호감을 주어 혁명의 지도자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전라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진 동학혁명의 불길은 순식간에 일만 명의 농민이 호응하게 되었다. 전라도 전역을 동학혁명의 깃발로 채우고, 각 관아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치안과 행정을 맡게 된다. 관찰사와 전봉준은 잠시나마 서로 도우며 간악한 벼슬아치들에게서 벗어나 백성들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인에 의한 혁명이 부분적이나마 성공하여 백성들에게 자율과 자유의 개벽 세상을 만들었다.
일본군에 의한 주권 찬탈의 야욕이 점점 노골화되자 전봉준은 드디어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 다시 일어섰다. 노도처럼 서울을 향하던 일만의 동학군은 공주의 우금치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참패한 후 동학의 불길은 점차 시들게 되었다.
전봉준이 일본군에게 잡혀 문초관 앞에 서자 당당하게 맞섰다. 결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회유에도 의연하게 맞서며 최후를 맞게 된다.
“무엇 때문에 봉기하였느냐?”는 문초관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일신의 해(害)를 위하여 기포(起包)함이 어찌 남자의 일이 되리오. 인민이 원탄(遠彈)하는 고로 민(民)을 위해 제해(除害)코자 함이니라.”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다른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가(可)하다.(같은 책 295)
목을 베어 종로 네거리에서 오가는 사람에게 피를 뿌려주라고 한 것은 사람들에게 혁명의 정신이 퍼지고 이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가족을 걱정하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히 흉내 내지 못할 장엄한 죽음이었다. 전봉준의 기개와 용기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동학의 기본 사상의 실천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신을 위한 순교가 아닌 백성을 위한 의연한 죽음이야말로 참다운 종교인이자 혁명가인 전 봉준다운 믿음이었을 것이다.
마루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긴다. 실패한 동학혁명 후 그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의 삶은 어떠한가. 1919년 3.1운동, 1960년 4.19의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6월 민중항쟁이 있었고, 2002년 월드컵 때 온 국민이 ‘붉은악마’가 되어 목이 터져라 외쳐던 내 조국 ‘대한민국’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서 성난 국민들이 외침이 있었다. 원인과 까닭은 다르지만 동학혁명의 후손다운 집단적 의사표시였다. 또 모임의 성질도 다르고 그 결과도 성공과 실패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동학혁명으로 개벽를 원했던 조상들의 유전자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는 국민을 파는 정치인,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지식인, 하나님을 빙자한 치부, 부처를 전혀 닮지 않은 사람들이 두드리는 목탁 등 젯밥에만 정신이 쏠린 선무당들이 횡행하고 있다. 고부 들판 전봉준의 생각에서 현재를 되돌아보는 마음은 무겁고 답답하기만 하다. 전봉준의 생가를 찾은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기념 촬영을 하는 것일까.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일부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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