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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꽃 핀 산하에서그곳에 가면 2015. 6. 25. 14:35
개망초꽃 핀 산하에서
혹한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떠나지 못하는 겨울이 2월 끝자락에서 북서풍에 눈보라를 싣고 와 뿌릴 때 지조를 지키는 선비처럼 고고하게 설중매가 핀다. 가끔은 질긴 뿌리를 남긴 겨울바람이 차갑기도 하지만 3월에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봄기운을 듬뿍 받은 진달래, 산수유, 매화 같은 꽃들이 무겁고 칙칙한 무채색을 걷어내기 시작한다. 훈훈한 바람이 부는 4월이면 자목련, 수선화, 튤립 같은 꽃들이 피고, 길가에서는 벚꽃이 이 땅을 다 덮을 듯한 기세와 화사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취하게 한다. 5월이면 꽃의 여왕 장미가 매혹적이고 섹시한 자태로 향기를 뿜어내면 꽃에 취한 사람들은 아릿한 가슴 한편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5월의 윤기 나는 나뭇잎들이 갓 서른을 맞은 청춘 같은 푸름으로 6월을 맞으면 이 땅에는 하얀 꽃 물결이 일렁인다. 흔하고 흔해서 아무에게서도 예쁘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하얀 옷을 입은 백성들이 시골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산화하던 모습 같은 개망초꽃이 핀다. 척박하고 메마른 땅이든, 기름지고 습한 땅이든 가리지 않고 무리지어 혹은 홀로 핀다. 지금 밭둑에도, 논둑에도, 길가에도, 들판에도, 산에도 피어 있다. 너무 흔해서, 너무 평범해서 주목받지 못하지만 홀로 하얀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모습이 가난해서, 재주가 없어서, 부모에게 물려받지 못해서, 공부를 못해서, 배경이 없어서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대다수 서민들의 모습과 닮았다. 못나서 자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진 게 없어서 사랑도, 아니 미움조차 받아보지 못하는 순하디 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힘 있는 사람들이 무시하면 무시당하고, 밟으면 밟힌 채로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할 수 없는 겁 많고 소심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누구도 사랑해 주지 않지만 좌절하지 않고 질긴 생명력으로 피고 또 핀다. 초여름 이 땅을 지키는 파수꾼 같은 모습으로. 하지만 그런 흔하고 평범한 꽃을 시인들은 본다. 사랑의 마음과 연민의 눈으로.
개망초
유강희
이 고개 저 고개 개망초꽃 피었대
밤톨같이 방울방울 피었대
낮이나 밤이나 무섭지도 않은지
지지배들 얼굴마냥 아무렇게나
아무렇게나 살드래
누가 데려가 주지 않아도
왜정때 큰 고모 밥풀 주워 먹다 들키었다는 그 눈망울
얼크러지듯 얼크러지듯 그냥 그렇게 피었대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쳤던 대상이 아름답게 생각되어질 때 그걸 다시 보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기차를 타고 고향을 찾아가는 어느 날이었다. 간간이 차창을 때리는 빗방울이 부서지며 다양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철길 옆에서 창 안을 기웃거리는 얼굴들이 있었다. 무더기로 핀 개망초였다. 군대에 간 아들이 휴가를 온다는 편지를 받고 동구 밖에서 비가 새는 우산을 쓰고 기다리는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다 외로움에 지쳐 몸이 야윌대로 야위고 얼굴은 손톱만하게 작아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삶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은 채 순백으로 빛나고 예쁜 노란 눈망울을 간직한 채 초연히 서 있었다. 가는 허리에서 금방이라도 우두둑 소리가 나며 주저앉을 듯한 모습이었다.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풍요롭게 살지 못하는, 늘 소외된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처연한 모습이었다. 윤기 나는 사랑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운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처럼 우수가 가득한 개망초였다.
개망초
양문규
우리는 별들을 헤아려
사랑이라 노래하지 못하고
오늘밤도 핏기 없는 살덩이를
별빛 속에 사르지 못하고
죄인처럼 고개만 떨구고 사는 걸까
하늘 한 번 떳떳하게
우러러보지 못하고 사는 걸까
시궁창보다 더 어둡고
암울한 이 땅 속에
살과 뼈를 묻고
거친 비바람 헤치며
억만년 꽃을 피우고 지우며,
또 그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꿈과 희망
고뇌와 실의 속에서도
더불어 함께 살아온 이 땅의
참 눈물이면서도
우리는 왜 별들을 헤이며
사랑이라 노래하지 못하고 하는 걸까
내가 죽어 한 줌 흙이 되면 그 무덤가에 누구도 가꾸지 않은 개망초가 피어 내 눈을 마주보며 그리도 주저하듯 말을 해 주리라.
“곁에 앉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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