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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니코프는 창고에서 강기슭으로 나온 다음 창고
옆에 쌓아놓은 통나무 위에 앉아 광활하고 황량한 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죄와 벌 2. 495쪽 도스토예프스키)
종수는 해미가 부탁한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려고 가면
남산타워에 반사된 빛이 잠깐 들어오는 창을 통해 그 탑을
바라보며 자위를 한다.
해미는 종수, 벤과 셋이서 대마초를 피우고 저녁놀이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웃옷을 벗고 부시맨 춤에 빠져든다.
벤은 화려하고 세련된 반포 아파트를 벗어나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호수를 찾아가 호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과 시선 너머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
해미가 찾아가고 싶은 지점, 리틀 헝거가 아닌 그레이트 헝거가
꿈꾸는 삶, 현실과 미래라는 경계선 즉 존재와 실존의 경계.
종수와 벤 역시 현실과 그 너머의 모호한 무엇을 찾고 있다. 거기
에는 메타포들이 난무한다.
해미가 종수에게 판토마임으로 귤의 존재와 부재에 대한 아리송한
설명을 해 주지만 종수는 그걸 이해할 수 없다. 종수에게는 해미의
판토마임처럼 의문의 고양이, 해미가 빠졌다는 우물, 벤이 불태운
비닐하우스의 존재가 납덩이처럼 어깨를 눌러 삶을 혼란에 빠트린다.
종수는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난해한 메타포를 해결하려 한다.
해미를 찾아 나선 종수에게 벤의 목욕탕에서 발견된 해미의 시계는
해미의 부재를 확인하는 메타포이고 결국 벤을 죽이고 차와 함께
불지른다. 그리고는 해미의 방에 찾아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모르던 종수가 해미, 고양이, 우물, 비닐하우스의
존재를 확인하고 난 후 비로소 소설에 쓰기에 대한 길을 찾았을까?
벤이 두 달 만에 불을 지른다는 쓸모없는 비닐하우스가 쓸모없는
여자들에 대한 메타포임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일까?
답은 없다. 그가 쓰는 건 소설이 아닌 벤을 죽인 자술서일 수도.
존재와 실존의 경계에서 유영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이 영화는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한때 그의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베스트 셀러였다.
그의 소설에는 나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섹스와 죽음이 등장한다.
「해변의 카프카」, 「노르웨이의 숲」도 그렇다. ‘버닝’에서도 그런 음산함이
깔려 있다. 해미와 종수의 어정쩡한 만남에서의 섹스, 해미의 방을
찾을 때마다 하는 자위. 해미를 죽이는 벤, 벤을 살해하고 불을
지르는 잔인한 폭력.
“섹스는 영혼을 헌신하는 일종이라 생각합니다.
섹스가 훌륭하면 상처가 치유되고 상상력이 활력을
얻지요. 이는 더 높은 영역으로, 더 좋은 곳으로
향하는 일종의 통로 역할을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재미이기도 하고, 공감할 수 없는 그의 소설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창동의 감독은 버닝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버닝은 원초적(순수한) 감각을 건드리기(감각체험)라고
할 수 있다. 소화시키기 쉽지 않은 영화다.’
‘요즘 젊은이들은 화를 내고 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해서
화가 나는지, 모호하고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이 미스테리로 보이고, 그런 세상에 대해서
젊은이들은 무력감을 가지고 있고 화를 내고 있다.’
‘해결할 수 없는 화로 가득한 젊은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해 묻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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