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니 모리슨의 소설 「술라」독서 2022. 5. 22. 15:09
어떤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사회적 환경을 알아야 한다.
1차 세계대전 후 미국 흑인들의 삶은 백인들에 의한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였다.
흑인들은 살아남는 것이 어쩌면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였고, 과제였을 것이다.
술라의 할머니는 자신의 한쪽 다리를 달리는 기차에 집어넣어 보험금을 타고,
그 돈으로 이층 집을 지어 세를 주고, 막내아들이 전쟁에 참전한 후 마약에 빠지자
불을 질러 아들을 죽이며 오로지 자신이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
술라의 어머니는 식료품 창고에서 뭇 사내들과 섹스를 즐기며 살아간다.
술라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생존과 위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잠재적 교육으로 가르쳐 준 셈이다.
술라와 넬은 한 몸처럼 유년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술라는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간다.
남의 시선이나 비난 따위는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으며 살아가고,
반면 넬은 일반들처럼 평범한 삶의 방식으로 충실하게 살아간다.
여기에서 두 사람에게 건널 수 없는 삶의 간극이 생긴다.
술라가 고향으로 돌아온 후 넬의 기쁨은 잠시였다. 자신의 욕구대로,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살아가는
술라를 바라보는 넬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심지어 술라는 넬의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 한다.
술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아무도 그를 찾지 않는다. 친구인 넬이 그녀를 찾아가서 묻는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니?”
“흠, 너는 내 앞에, 뒤에, 내 머릿속에 이런 공간이 있었어. 어떤 빈 공간 말이야. 그런데 주드가 그
걸 채워주었을 뿐이야.”
‘나는 섹스를 했을 뿐인데 우리가 좋은 친구라면 왜 그걸 극복하지 못하느냐?’고 당당하게 묻는다.
술라에게는 선과 악도 없고, 근거가 모호한 의무감도 없고, 뺏고 뺏기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
욕심도 없고 관심을 끌거나 칭찬을 받고 싶은 욕망도 없고, 한마디로 자아라는 것이 없고,
그런 이유로 그녀는 자신을 입증할,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어야 할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는다.
술라는 넬에게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살아봤어."
죄의식이나 윤리 같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나 금기조차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악마(?)가 된 친구, 술라가 죽었을 때 넬은 이렇게 울부짖는다.
“이 계집애야, 이 계집애야, 이 계집애야!”
강신주 철학자는「감정수업 」에서 이 소설을 ‘경쟁심’으로 정의했다.
넬의 남편 ‘주드는 두 사람에게 잘해야 하는 장난감과 같은 존재였다.’
넬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남편 주드가 아니라 술라였다는 것이다.
술라가 죽고 나서야 넬은 그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철학자의 말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넬은 술라의 죽음 앞에서 남편과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한 친구에 대한 차마
놓을 수 없는 연민으로 ‘이 계집애야’라고 울부짖지 않았을까?
※토니 모리슨의 1993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 여성 작가라고 한다.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미덕의 불운」 (0) 2022.06.29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 (0) 2022.05.31 이상의 제비 다방 (0) 2022.01.27 라면을 끓이며 (0) 2021.07.10 일본에게는 예(禮)를 차리지 말라 (박경리 작가) (0) 2021.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