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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산동 산수유꽃그곳에 가면 2023. 3. 15. 15:04
산수유꽃 진 자리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 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산수유에게
정호승
늙어가는 아버지를 용서하라
너는 봄이 오지 않아도 꽃으로 피어나지만
나는 봄이 와도 꽃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봄이 가도 꽃잎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내 평생 꽃으로 피어나는 사람을 아름다워했으나
이제는 사람이 꽃으로 피어나길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꽃처럼 열매 맺길 바라지 않는다
늙어간다고 사랑을 잃겠느냐
늙어간다고 사랑도 늙어가겠느냐
산수유나무에게
도종환
산수유나무 허리 휘었다
사는 동안
모진 바람 몰아칠 때마다
이겨보려고 꺾이지 않으려고
몸 전체를 불러내어
싹쓸바람 설한풍에 맞섰을 텐데
이기지 못한 게
서너 차례는 되는가 보다
이긴 날이 더 많았을 텐데도
이리저리 휘어진 채로
나이를 먹어가며
겨울 초입까지 왔는데
빨간 열매를 가득 달고 있는 모습이
눈물겹다
오늘은 열매가 유난히 빨갛다
겨울산에서 뉘우치다
안도현
이 세상을 점점이 묘사하며 내리는 눈송이
이 풍경 한쪽 구석에다 내 이름 석 자 쓰고
붉은 낙관이나 하나 꽝, 찍어버려?
너, 이 도둑노옴!
무엇을 더 가져가겠다는 거니?
내 이마를 후려치고 가는 눈발의 회초리
내 마음 문득 어둬 산수유 열매 붉어라
산수유꽃 필 무렵
곽재구
꽃이 피어서
산에 갔지요
구름 밖에
길은 삼십리
그리워서
눈 감으면
산수유꽃
섧게 피는
꽃길 칠십리
구례 산동에서
회색갈피
호랑지빠귀 부드럽게 속삭이지 못하고
밤중에도 어둠을 가르며 악을 쓰고
딱따구리 죽은 나무 골라
화엄사 스님보다 빠르게
목탁을 치는데
산동 냇가에 늙은 산수유
수선화보다 먼저 화장을 한다
봄을 유혹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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