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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과 가사
문명과 기술의 발달은 여러 면에서 많은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전자 기술의 발달은 가정에서 여자들이 해야 할 여러 가사 노동을 줄여 주었다. 절구통에다 곡식을 찧어서 식구들의 밥을 하고, 가족들의 옷을 직접 만들어 빨래하고, 풀 먹이며 다듬이질과 다리미질, 장을 담가 장독에 담아두고 윤이 나도록 장독을 닦고, 산에서 나무 한 단씩 하여 밥 짓던 일 등이 지금은 전설처럼 되고 말았다.
TV는 거실을 천하통일 하여 마실을 통하여 아낙네들이 온갖 정보와 이야기를 나누던 재미를 앗아갔고, 가스나 전자레인지는 부엌에서 눈물 콧물을 흘리며 밥을 짓던 고생을 해결했고, 냉장고는 여름철 신 김치와 부패하는 음식을 예방하는 해결사로 등장한지 오래 전이다. 청소기, 세탁기, 믹서기, 세척기, 전기밥솥 등 여자들의 일을 줄여주는 기구들이 나날이 새롭게 등장하여 여자들에게 반복되는 일을 줄여주고 있다. 여자들의 사회참여가 많아지는 추세에서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때론 이런 여자들의 일로부터의 해방이 주부들에게 향락과 소비문화 그리고 사치성 가구, 옷, 화장품 구입 등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직장에 다니는 주부들은 집안 살림을 하느라고 남자에 비하여 자신의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부엌에서 하는 일이 자동화된다고 하여도 남자들과 일을 분담하지 않으면 여자들은 남자에 비하여 할 일이 월등히 많은 게 사실이다. 여자보다 살 한 덩이 더 붙이고 나왔다고 가정에서 목에 힘만 주는 남자들의 태도가 변해야 일상에서 남녀가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이 부엌에서 하는 일은 반복적이고 표가 나지 않는 지겨운 일이다. 나의 동반자가 하기 싫어하는 일은 청소이고, 아직도 서툰 일이 두어 가지 있는데, 어쩌다 곡식에서 돌을 가려내는 조리질이다. 시골에서 자란 내가 조리질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어도 진전이 없다. 내가 하는 게 낫다. 또 하나는 상추를 씻을 때 농약과 벌레가 걱정이 되어서 살살 씻지 못하고 상추를 거의 으깨는 수준으로 씻는다. 상추를 씻을 때 내가 스스로 나서는 것이 으깬 상추를 먹지 않는 비결이다.
여자들이 하는 일들이 거의 다 자동화되었는데 자동화되지 않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마늘을 까는 일이다. 특히 마늘이 많이 필요한 쌈이나 김치 등을 해 먹을 때 마늘을 까는 일은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하는, 힘이 들기보다는 단순 반복 작업에 싫증이 나는 일이다.
마늘이 많이 필요할 때는 내가 담당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게 손으로 그냥 벗겨지는 것이 아니고 칼을 들이대야 겨우 벗겨지고 속껍질까지 벗기려면 여간 정성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 마늘을 좀 까면 피부가 여린 나는 왼손 검지에 마늘 즙이 스며들면서 아리다. 이삼 일 지나면 거기가 껍질이 벗겨진다. 그렇다고 마늘 안 먹을 수는 없고, 믹서 만들듯이 마늘 까는 기계 좀 만들어 내는 사람 없을까. 그러면 나처럼 마늘 까고도 마늘 속껍질 덜 벗겼다고 타박 듣는 사람도 없을 텐데.
20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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