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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른 풀 우거진 길(성두에서 향일암 가는 길)
    새와 나무 2017. 12. 19. 14:39


     마른 풀 우거진 길(성두에서 향일암 가는 길)

     

     

     

     

       여수(麗水).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땅이다. 여기 저기 가 볼만한 곳이 많다. 내 고향 군산을 떠나서 여기에 산지가 23년이 넘었으니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하지만 먹고사는 게 바빠서 여수 구석구석을 가보지 못하였다.

    화양면 쪽에서 바라보는 낙조도 괜찮을 것 같고, 거문도와 백도의 바다 풍경도 좋을 듯하고, 연도에서 바라보는 일출, 돌산 대교와 예암산 위로 떠오르는 달도 빼어날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돌산의 오른쪽 끝 성두에서 향일암 뒤 금오산으로 가보기로 했다. 오전 620분 버스가 마지막 승객인 나를 성두 종점에 남기고 횅하니 가버리자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마을로 접어드니 가파른 벼랑 같은 곳에 20여 호의 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있고,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다. 동네 사람들에게 향일암으로 가는 길을 물어 좁은 밭길을 따라 걸으니 작은 언덕이 보인다. 그 너머가 바다라는 건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언덕을 넘으니 먼저 칡덩굴이 다리를 휘감는다. 바다가 해미에 싸여 희뿌연 채 잘 보이지 않고 어선의 기관 소리만 희미하게 들린다.


       사람의 기척은 없고 바닷가로 난 길은 억새와 풀들이 우거져서 길을 가기가 쉽지 않다. 등성이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는 무성한 풀들이 내 키보다 큰 곳도 있다. 이슬에 젖은 풀들이 온몸을 적신다. 길이 보이지 않으니 더듬더듬 나가는데 바닷가 쪽으로 발을 한발만 헛디뎌도 가파른 곳으로 굴러 떨어져 다시 기어오르기가 어려워 보인다. 많은 돌들과 풀이 어우러져 뱀이 숨어 겨울잠을 자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아 발뒤꿈치에 소름이 돋는다. 독사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오고가는 사람도 없는 이 외진 곳에서 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피식 웃어본다.


       안개만 끼지 않았으면 오른 쪽 바닷가로 보이는 섬들과 옥빛 바다가 만들어 내는 풍경이 제법 수려하고 아름다울 것 같은 길이다. 하지만 안개에 가린 바다는 희미하고 길은 보이지 않으니 경관보다는 발에 더 신경을 쓰며 걷는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터덕거리며 가다가 어느 날 벼랑 아래로 발을 헛디디듯이 추락하여 허망한 삶을 끝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언제 발을 헛디딜지 모르는 채 온갖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허기진 듯 살다가 가는 삶을 생각하면 일찍 출가하여 산사에서 가부좌를 틀고 좌선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한참을 억새와 싸우며 걸으니 소나무 그늘과 오른쪽으로 제법 널따란 바위가 있어 발길을 멈추고 앉아 눈을 감는다. 누가 가만히 어깨에 손을 얹는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웬 여인이 곁에 서 있다. 깜짝 놀라 누구냐고 물으니 뒤따라온 사람이라고 한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아 벌떡 일어서니 여인은 없고 바다에서 인 바람 한 줄기가 소리 없이 스쳐지나 간다. 이 바위에서 여인이 투신이라도 한 적이 있었는지 웬 헛것이 다 보인다. 아니면 잠시 망상에 젖었는지 모르겠다. 밑을 내려다보니 수백 길은 됨직한 데 바로 아래 고사목 몇 그루가 쓸쓸하게 서서 너럭바위를 지키고 있다.

          찬바람이 씽씽 이는 겨울에 보는 풍경이 제법 아름답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금오산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20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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