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저승길 밝히는 등불(봉선화)
    새와 나무 2017. 12. 22. 15:04


    저승길 밝히는 등불(봉선화)

     

     

     

              딸아이가 손톱에 매니큐어를 빨갛게 칠하고 있어서, 왜 칠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했단다. 남이 하니까 덩달아서 했다는 말로 들린다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의 유행과 패션은 개성을 상실한 모방 충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원래 유행이라는 것은 흐르는 물 같아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유행이 만들어진다. 요즘 거리를 휩쓰는 유행의 물결이 때로는 지나치게 천박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손발톱을 칠한 것은 그래도 애교가 있다.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 머리를 붉은색, 노란색 등 원색으로 염색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슬며시 고개를 드는 거부감을 어쩔 수 없다. 물론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가치의 혼돈 때문이라고 위안을 삼아보지만…….   길거리에서 드물게 손톱에 봉숭아로 물을 들인 사람을 볼 때가 있다. 사라져 가는 천연기념물을 보는 듯 반갑다. 그러고 보면 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속도감과 변화에 둔감한 고지식한 사람인가보다.

     

      봉숭아는 우리 민족의 애환을 가장 잘 나타내는 꽃이 아닐까. 일제의 혹독한 식민정치에 시달리며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를 부르며 슬픔과 울분을 씹어야 했던 조상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꽃이다.


       도둑처럼 한밤중에 몰래 찾아왔다가 떠나버린 뒤 편지 한 장 보내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독립군 아내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 소작료와 공출로 일 년 농사지은 것 다 빼앗기고 하염없이 눈물짓는 이 땅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천황을 위해서 전쟁터로 끌려가는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울분을 주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 정신대로 끌려가는 아직 피지도 못한 딸의 모습을 보며 피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던 어머니의 모습, 제 말과 글을 쓰지 못하여 민족의 혼을 나타내는 창작을 할 수 없었던 좌절하는 지식인의 모습, 사사건건 불손한 예술이라고 트집을 잡아 창작을 못하게 하여 절망하던 예술인의 모습이 떠오르는 꽃이 바로 봉숭아다.


       누가 그런 봉숭아를 손톱에 물들이기 시작하였을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아우내의 독립만세 소리가 전국으로 번지듯 나이를 가리지 않고 이 땅에 사는 여자들의 손톱을 물들이기 시작한 봉숭아는 어쩌면 나라의 꽃인 무궁화보다 더 친숙하고 정이 가는 꽃이다.


       민족의 혼을 자르기 위하여 온갖 악랄한 짓을 다하던 일제의 압제 속에서 봉숭아물을 들인 손녀딸과 늙은 할머니가 손을 잡고 불렀을 그 노래 소리가 이미 잊혀진지 오래이지만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는 한 덩이 돌처럼 굳어진 봉숭아의 이미지가 남았다.

    봉숭아물을 들인 손톱은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한 색감이 우러나는 것이 우리 민족성을 꼭 닮은 것 같다. 사치스럽지 않고 그렇다고 천박하지 않다. 단정한 모습으로 모퉁이를 돌아가는 누나의 모습 같은 느낌이 든다. “누나야.” 부르면 소리 없이 웃으며 되돌아보는 누나의 모습. 검정 저고리와 흰 무명치마가 잘 어울리는 모습의…….

     

      고재종의 시집을 뒤적이다가 봉숭아를 노래한 시 한편을 읽으며 미소를 지었다.

                  

      누님

     

    저것 좀 보아 저 아가씨

    봉선화 따서 손톱 묶네

    ……

    말만한 엉덩이 저 아가씨

    어쩌자고 저 아가씨

    바알갛게 달아오르네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네

    아아, 저 아가씨 눈이슬 짓네

    내사 차마는 못 보겠네

    진저리 치다 깨어나니

    울밑에선 봉선화 비에 젖네

     

       이 시를 처음 대할 때 만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이라는 유행가의 구절이 생각났는데, 마지막 행을 읽으며 앞의 내용들은 마지막 연을 돋보이게 하는 들러리 같았다. 이성에 눈을 뜬 아가씨의 고조되는 마음을 조율할 수 없을 만큼 긴박하게 치고 올라가다가 마지막 행에서 벼랑으로 떨어지는 듯한 이완과 애잔함으로 끝을 맺고 있다. 봉숭아에 대하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과 서러움의 이미지를 울밑에서 비에 젖고 있다는 한마디로 잘 나타내주고 있다.

       봉숭아에 대하여 느끼는 애틋한 감정이 일제 시대 이전에도 우리 조상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 봉숭아가 이처럼 우리에게 친근한 꽃으로 인식되는 어떤 교감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맞아떨어진 게 아닐까. 예전의 가사 문학으로 남아 있는 작자 미상의 봉숭아 노래를 통하여 그 시대 여성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봉선화가

     

        춘면(春眠)을 늦추 깨어 차례로 풀어놓고

        옥경대를 대하여서 팔자미(八字眉)를 그리랴니

        난데없는 붉은 꽃이 가지에 붙었는 듯.

        손으로 우희려니 분분히 흩어지고

        입으로 불려 하니 서린 안개 가리었다.

        여반을 서로 불러 낭랑히 자랑하고

        꽃 앞에 나아가서 두 빛을 비교하니

        쪽 잎의 푸른 물이 쪽보다 푸르단 말

        이 아니 옳을 손가. (봉선화가 일부)

      (하룻밤 자고 봄잠을 느지막이 깨어서 손톱에 물들이려고 싸매었던 것을 풀어놓고 경대 앞에 앉아서 여덟팔자 고운 눈썹을 그리려고 하니, 난데없는 붉은 꽃<물감들인 손톱>이 가지에 붙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손으로 움켜쥐어 보려고 하니 어지러이 흩어져 버리고, 입으로 불어 보니 안개가 서린다. 이 대목의 표현이 아주 상징적이다.

       여자친구<女伴>끼리 서로 자랑을 하는데, 물들인 손톱 빛깔이 봉숭아꽃 빛보다 오히려 아름답게 보이는 구나. ‘靑出於藍而靑於藍이라는 옛 문구가 사실이로구나. 우리 가사문학 이렇게 좋은 것인데. 김종오. 294)

     

       이렇듯 봉숭아는 옛날부터 여인들의 벗이 되었다. 서로 손톱에 든 물을 비교해보면서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나려고 했나보다. 어쩌면 손톱에 꽃물을 들임으로써 폐쇄적이고 억압으로 인한 한을 풀어 보려고 했는지 모른다. 이런 습관이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신기한 생각이 든다.

     

      매니큐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칠이 벗겨지고 흉하게 변해가지만, 봉숭아물을 들인 손톱은 시간이 지날수록 은은한 아름다움으로 변해 간다. 손톱이 자라며 반달같이 변해 갈 때는 봉숭아 물이 들지 않은 하얀 부분과 잘 어울리고, 손톱 끝에 초승달처럼 남아 있는 모습은 애잔하고 아려(雅麗)한 여운을 가지고 있다. 그런 모습을 아직도 볼 수 있다는 것은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손톱에 물들인 봉선화 물이 첫눈이 내릴 때까지 남아있으면 첫사랑을 만날 수 있다는 푸근한 이야기도 있다. 돌아올 겨울에는 첫눈이 일찍 내려서 봉선화 물을 들인 처녀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어린아이들과 꽃 같은 처녀들이 매니큐어가 아닌 봉숭아로 물을 들인 모습은 분명 우리의 정감을 조용히 자극하는 흐뭇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그렇다면 할머니들이 봉숭아물을 들인 모습은 어떨까. 여자라면 나이에 관계없이 아름다워지고 싶은 본능 같은 것일까. 아니면 황혼에 들어선 아쉬움을 소녀적 취향으로 달래보려는 감상적 행동일까. 물론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깊은 뜻이 있다고 한다. 노인들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것은 저승 갈 때 어두운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고 한다. 낯설고 어두운 저승길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칠흙같이 어두운 길에 봉숭아물을 들인 손톱이 등불이 된다면 그 길을 가는 두려움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그렇게 해서라도 위안을 삼으려는 마음이 그 어떤 종교적인 믿음보다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독대 밑에서 할머니와 손녀가 손톱에 물들이려고 봉숭아와 백반을 찧어 실로 묶으면서 잘 되지 않는다고 서로를 탓하고 있을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새와 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 분 미국 사람 미국 놈  (0) 2018.01.04
    매향리  (0) 2017.12.22
    묵은 묘지가 있는 곳  (0) 2017.12.19
    마른 풀 우거진 길(성두에서 향일암 가는 길)  (0) 2017.12.19
    마늘과 가사  (0) 2017.12.14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