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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칼국수
서점에 들렀다가 밖으로 나오니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당히 드세고 쌀쌀했다. 버스 정류장에 가까이 오다가 바로 옆에 있는 식당(간단한 김밥과 분식을 파는 집)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다. 칼국수를 하나 시키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사람들이 자꾸 들어온다. 대부분 여자들이다. 칼국수를 먹는 사이에 손님들은 자꾸 늘어서 가게가 거의 가득 찼다.
혼자서 칼국수를 먹으려니 왠지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면이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어서 손칼국수의 정감을 느낄 수 없었다. 국물은 인공 조미료가 들어가서 개운한 맛이 나지 않고 미끈거렸다. 불편한 자리와 인공 조미료가 들어간 칼국수가 낯설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밀가루는 거의가 미국산이다. 값싼 미국산 밀가루가 우리의 밀을 고사시킨 지가 이미 오래 전이다. 우리 농산물을 거의 절멸시킨 것이 밀뿐만이 아니라 콩, 쇠고기, 식용유 등 여러 종류이고, 주식인 쌀을 밀어낼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지금 세대들이야 우리 밀가루의 맛을 보지 않았으니 미국산 밀가루에 맛이 길들여진 게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맥도날드 햄버거와 코가 콜라에 친숙해진 아이들에게 떡이나 부침개가 촌스럽고 후진 음식으로 생각될 게 틀림없거니와 입맛에도 맞을 리가 없다.
몇 년 전에「말」지에서 보니 미국의 밀은 우리처럼 햇볕에 말리는 것이 아니라 수확하면서 온갖 종류의 살충제와 건조제 그리고 방부제를 섞는다고 한다. 그 밀은 수십 년을 야적해 놓아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미국산 밀가루로 만든 온갖 식품을 우리가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시골에서 밀가루를 만들기까지 과정을 되돌아보면 단순한 노동 이상의 것이었다. 밀을 수확하면 개상질을 하여 밀의 낟알을 얻거나, 홀태로 훑은 다음 기계로 탈곡을 하였다. 그런 다음 풍석으로 부뚜질을 하거나, 풍구로 바람을 일으켜서 티끌과 먼지를 가려냈다. 그 밀을 깨끗한 물에 씻어 조리질을 하여 돌을 가려내고 멍석에서 정갈하게 말렸다. 방앗간에 가서 분쇄기에 밀을 붓고 한참을 기다렸다. 분쇄가 다 끝난 밀가루는 뚜껑이 있는 큰 서랍처럼 생긴 곳으로 나왔다. 그 안에는 촘촘한 체가 있어 밀기울과 분리된 하얀 밀가루가 걸러져 나왔다. 따뜻한 열기가 가시지 않은 밀가루를 어머니가 자루나 큰 양은그릇에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때가 되어 바로 그 밀가루로 칼국수를 만들었다. 밀가루를 반죽하여 큰 안반(떡판)에 놓고 다듬이 방망이로 둥글게 늘인 다음 어머니가 익숙한 솜씨로 잘게 썰면 국수가 되었다. 대가족이 먹기 위하여 무쇠솥에 물을 붓고 끓이다가 면과 애호박을 넣고 끓이면 맛있는 칼국수가 되었다.
그 밀가루에 살충제나 건조제가 들어갈 리가 없었다. 장마철에 조금만 소홀히 하면 어김없이 밀가루에서 바구미가 생겼다. 오염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오염되지 않은 것은 해충이나 미물이 인간보다 먼저 알았다.
칼국수를 먹고 나오면서 정성을 들인 옛날 밀가루와 손으로 만들었던 고향의 칼국수를 생각했기 때문인지 저녁내 뱃속이 들끓었다.
(20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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