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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 줄기를 따라가며(금강 하구둑에서 강경)
    새와 나무 2018. 3. 12. 14:46



    금강 줄기를 따라가며(금강 하구둑에서 강경)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이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 옳게 금강이다. 형은 서서남(西西南)으로 밋밋이 충청 전라 양도의 접경을 타고 흐른다. 이로부터 물은 조수까지 섭슬려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 너비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이름난 강경벌은 이 물로 해서 아무 때고 갈증을 잊고 촉촉하다

     (탁류 일부 채만식)

     

        강의 끝 하구둑 아래 채만식의 기념관 부근에서 서해와 금강이 만난다. 채만식이 태어나고 작품을 쓴 곳이 금강에서 가까운 임피면이니까 하구 둑 아래 기념관을 세운 것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태평천하와 함께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탁류가 금강에서 나고 자란 경험에서 구성되어진 것이라는 것을 예문에서 알 수가 있다.


       지금은 금강 하구 둑이 놓여 장항과 군산을 쉽게 건너다닐 수 있고, 둑 위아래 강물은 겨울철새들의 낙원이 되었다. 강물이 얼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먹이를 주고 있다.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철새들을 게으른 녀석들로 만들고, 그리하여 철새들의 야성을 반감하여 살아가는데 오히려 해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힘차게 무리 지어 나는 모습을 보려고 기다려도 새들은 날아 솟구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하구둑을 지나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금방 서포에 이른다. 예전에는 강가에 무성한 갈대가 덮인 황무지였는데 지금은 경지정리가 잘 된 논으로 바뀌었다. 강둑에 오르면 강줄기와 논이 다 한눈에 들어온다. 어린 시절 여기에는 소금기가 가시지 않은 척박한 땅으로 갈대가 무성했다. 갈대밭 사이사이에 살고 있는 게들을 잡으려고 형을 따라서 고향마을에서 이십 리가 넘는 길을 왔었다. 폭염이 내리쬐는 갈대밭에서 게를 잡다가 목이 말라 물이 먹고 싶었지만 먹을 물이 없어 혼이 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포장이 잘 된 이차선 도로를 따라서 조금 올라가니 나포가 나온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 나포에서 임피중학교까지 이십 리나 되는 길을 걸어 다녔다. 친구들을 따라서 나포에 몇 차례 산길로 온 적이 있다. 옥곤리 뒷산 꼭대기에서 어른들이 그물을 가지고 산을 넘는 오리나 기러기를 잡던 모습이 희미하게 생각난다. 강에는 그 시절만 해도 황포돛대를 단 작은 배들을 볼 수 있었다. 서해에서 잡은 고깃배가 닿던 곳 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강에 배 한 척 볼 수 없는 죽은 강이 되고 말았다. 삶의 애환을 간직한 강물은 하구 둑을 막아 흐르지도 못하고 마치 과거와 현재가 단절된 듯 멈추어 있다.


       나포를 지나면 웅포에 이른다. 이곳에도 어선들이 드나들어 생선 비린내가 사람들의 활기찬 고함 소리와 뒤섞여 삶을 이어주던 포구였다. 지금은 음식점 하나가 포구에 자리하고 아이들 두어 명이 강가에서 싱겁게 놀고 있다. 도시로 떠나간 젊은이들이 다시는 고향을 찾지 않고, 예전에 고기를 잡던 사람들의 숨결만이 강물 속에서 스러져 가고 있다. 웅포를 지나면 바로 갱갱이(강경)이다. 1930년대 평양, 대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였다고 한다. 서해에서 고깃배들이 생선을 산더미처럼 퍼놓으면 전국 각지에서 장사들이 모여들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이전 나당 연합군의 전함들도 여기에 이르러 다시 보급을 받고 내쳐 부여로 거슬러 올라 백제를 멸망시킨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예전의 풍요로웠던 어선과 상인들의 자취는 사라지고 포구 위쪽 도로를 따라 30여 개의 젓갈상점들만이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고 한다. 부여와 강경을 잇는 다리 아래 나루터에는 잔디를 심어 공원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강경을 벗어나면 황산벌이다. 계백장군이 신라와 최후의 일전을 벌여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곳이다. 오백 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노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신라군과 사생의 결단을 내기 위하여 결심했던 곳이다. 처와 자식들의 목을 베고 출전하여 장렬한 피를 뿌렸던 장군과 결사대의 기개가 서린 땅이다. 백제유민의 슬픔은 강물이 되어 흐르고 흘렀을 것이다.


       강폭은 점점 줄어들고 강줄기를 따라 오르면 충북 옥천의 보청천, 조치원의 미호천, 강천 등 20여 개의 크고 작은 지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무주구천동 계곡에 이르게 되고, 결국은 금강의 발원지인 전북 장수의 서사면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를 다 돌아보자면 며칠이 걸려야 할 여정이다. 401km에 이르는 강줄기마다 흥망성쇠, 약탈과 억압을 간직하고 흐르는 강줄기이다. 지금은 하구 둑으로 막혀 흐름을 정지당한 채 인공의 양수시설을 통하여 호남평야로 유입되어 가뭄을 막는 젖줄기가 되었다.


       금강 줄기를 따라가며 느끼는 아쉬움은 한강에서 공주와 부여 그리고 아랫녘으로 이어지는 백제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체계적인 관리와 투자가 생각이다. 경주와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백제의 후손으로서 금강을 따라가며 조상들의 옛 자취를 찾아가는 길이 너무 한적하여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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