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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이별할 때새와 나무 2018. 3. 21. 14:14
사랑하며 이별할 때
거실 유리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나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눈을 떴다. 잠 속에서 어떤 낌새를 느끼게 한 것이 무엇인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잠자기 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거실에는 인기척이 없고, 이른 새벽의 고요 속에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요란하다.
몇 시나 되었나 하고 시계를 보려고 일어나다가 거실이 환하다는 느낌이 든다. 날이 밝은 것 같지는 않아서 베란다로 나가보려고 움직이다가 움찔 놀랐다. 베란다 창문너머 장군산 위로 이울어 가는 스무 나흘의 달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때야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던 것이 바로 달빛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소복한 여인의 모습 같은 스무 나흘의 달이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어찌 잠을 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잠든 사이 언제쯤 거기 나타나서는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하는 그 간절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나보다.
첫새벽 여명이 오기 전 정치한 고요 속에 여리지만 선명한 달빛에 물들어 내 몸 어디쯤에서 명징하게 돋아나는 그리움의 소리를 듣는다.
‘안․속으로부터 참아 나오는 울음
소리 지른 것이
분명했다.’는 김광림(꽃의 사초1의 일부)의 시 구절 같은…….
누군가에 의해서 자신도 모르게 관찰되어지고 주시되어지는 경우가 있다.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서 속앓이를 하는 짝사랑의 마음처럼 스무나흘의 달이 간절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오늘 새벽 같은 달빛으로……. 어쩌면 사랑하면서도 헤어진 연인의 눈빛이 저런 눈빛일지도 모른다. 사랑하지만 일상의 틀을 깨지 못하는 인위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포기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저 달빛처럼 보이지 않을까.
만남 뒤의 헤어짐이 서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일어나게 될 때 그 이별의 아픔은 그믐을 향하는 달빛처럼 애처로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이별은 미움보다 깊은 상처를 남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미워하며 이별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사랑하며 이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람들의 부주의로 인한 미아, 교통사고,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이별도 있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모의 반대로 이별하는 경우도 있다. 신과 인간이 사랑하다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상 속의 사랑도 있고, 야수와 미녀의 사랑도 있고, 남녀 간의 이루지 못할 사랑도 있고, 일곱 난쟁이가 백설공주를 사랑하다가 왕자에게 빼앗긴 동화 속의 사랑도 있다.
달이 베란다 난 화분의 곁에 올 때까지 달빛이 만들어 내는 음영이 희미해지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변해 가는 그림자처럼 마음도 흔들리고, 달빛에 젖은 난에서 금방이라도 향기 그윽한 단아한 꽃송이라도 피어날 것 같아 베란다로 나가 난을 기웃거려 본다.
비록 꽃송이와 향기는 없어도 당장이라도 굳건하게 치솟아 오를 것 같은 꽃대를 기대해 본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고 다가와 서는 애잔한 그리움으로 남을 그런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을 향해 가는 달빛과 단아한 난이 스쳐 가며 사랑하며 이별하는 첫새벽의 그리움을 간직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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