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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의 모래성
2001년 한동안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던 영자 부녀 이야기가 있었다. 깊은 산속에 살고 있는 순박한 모녀의 생활을 도시인들에게 끌어내어 관심을 받게 한 언론이 모녀를 불행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최근 그 영자가 비구니가 되어 절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모녀의 생활을 파괴하게 된 동기는 언론이었고, 거기에 지나친 관심을 가진 도시인들이 모녀의 생활과 자신들과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 생긴 불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모녀를 상업적으로 이용해서 이익을 보려했던 사람들의 행태가 지금도 변함없이 꿈틀대고 있다. 세련되고 데테일 하게 변형된 채로. 그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자연 自然
언제나 맑은
강물이 흘러가고
……
들에는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이
순수한 자연 자연은
나는 좋아라
강원도 삼척 큰병산 사무곡에서 사는 열여덟 살 영자가 지은 시다. 18년 동안 문명을 거부한 아버지와 단 둘이서 산 속에서 사는 영자의 마음을 나타낸 시다. 영자에게는 사회의 아픔을 느끼는 접촉도, 사람들과의 빚어지는 분노도 없는 다만 자연과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그런 환경에서 지은 시답게 단조롭지만 보이는 대로 투명하게 쓰여 진 시다. 누가 이 시를 자신들이 사는 문명사회의 가치 기준으로 수준을 논하려 한다면 그건 청진기로 뇌를 들여다보는 행위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영자는 사무곡에서 바라보는 파르스름한 새벽 공기와 푸른 이내, 물소리와 새소리, 하늘과 바람소리,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들과 교감하는 아름다움을 그의 책(열여덟 산골 소녀의 꽃이 피는 작은 나라)에 적고 있다. 특히 가을에 피는 야생의 노란 국화꽃과 향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도계장에 나가 자장면이 먹고 싶어도 아버지의 주머니를 생각하여 말하지 않고, 돼지고기 한 근을 사서 된장찌개를 해먹고 싶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영자다. 20만원으로 한 달 생활을 하는데 저축도 하며 산다는 부녀의 삶은 이미 문명인들이 넘볼 수 없는 저 편에 존재하는 피안의 세계였다.
유일한 창이라고 말하는 등산객이 주고 간 라디오를 통하여 세상의 소식을 듣고 판단하며 살고 있는 산골 소녀 영자의 순수한 삶 속에는 그래도 소설이 있고, 그림이 있고, 시가 있다. 제도권 교육이라고는 단 일주일밖에 받지 못한 영자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하여 상당한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영자가 쓴 책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물론 그 책의 내용은 출판사에서 손질을 심하게 했는지 영자의 시에서 느끼는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세련된 글들이다.
영자는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하고(특히 킬로만자로의 표범을 좋아한다고 한다.), 김주영의「천둥 소리」에 감동을 느끼고 이문열의 작품에서 무게와 깊이를 느낀다는 영자는 여느 문학 소녀의 수준을 넘어서는 평을 쓰고 있다. 장차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글을 쓰며 살던 이 소녀의 비극은 결국 바깥세상 사람들의 상업주의에서 시작되었다.
사모곡의 계곡물처럼 투명한 영자의 마음에 유혹의 손길이 뻗고, 영자를 이용하여 돈을 벌어보려는 사악한 인간들과 접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견고하기만 하던 영자의 성은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교육을 받지 않은 산 속의 열여덟 살 소녀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상당한 수준의 글과 그림솜씨 그리고 일상처럼 써나가는 시들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영자에게 새삼 무슨 제도권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꼬드겨서 결국은 영자가 자신의 전부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를 뒤로하고 하산하고 말았다. 아니 그 이전 사람들이 부녀의 생활을 기웃거리기 시작하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TV와 잡지사에서 무슨 구경거리가 났다고 그들의 사생활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처럼 철저히 부녀의 생활을 까발리는 폭력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힘 있는 사람의 비리와 부정에 그처럼 용감하게 카메라를 디밀었다면 이 사회는 훨씬 좋은 사회가 되었을 텐데.
‘하지만 나는 토종벌이 귀하지 않아도 좋으니 자기의 영역을 쉽게 내주지 않으려는 투지나 유연함이 토종벌에게 생겼으면 좋겠다(앞의 책 121쪽).’는
영자의 소망은 바로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TV 광고로 받은 돈을 영자의 후견인이라는 사람이 가로채고, 아버지는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 이유가 돈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가로젓지 않을 수 없다. 바깥 인간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끈덕지게 영자를 졸랐기에 영자가 ‘내가 알고 있는 단 하나 - 아버지이며 어머니이자 선생님이며 나의 모든 것인 아버지’의 걱정하는 눈길을 외면하고 낯모르는 사람을 따라나설 수 있었을까.
지금 영자는 그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대인 기피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이제 그녀의 삶을 그리고 아버지의 삶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었더라면 도시인들에게도 자연으로 회귀하고픈 아릿한 향수를 가지게 했을 부녀의 삶은 무너졌다. 앞으로 소설가가 되어 충주에서 살고 싶다던 영자의 꿈은 모래성이 되고 말았다. 아니 도시 문명이 아니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람들의 꿈이 산산조각이 되었다. 그냥 바라보았으면 소중했을 부녀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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