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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불사로 가는 길
    지리산 2015. 3. 11. 21:12


     

      겨울 풍경은 잘 닦여진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다. 깊고 넓게 범위를 확대하여 투명해지는 들과 산은 말알간 수녀의 모습처럼 경건하다.


      구례를 지나 하동 쪽으로 구비구비 돌아가는 섬진강의 훌쩍하게 야윈 물줄기는 채 감싸 안지 못하는 모래와 돌무더기를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바닥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줄기는 옥색 물빛 위에 눈부신 햇살을 담아 은어 떼의 반짝이는 유영처럼 눈이 부시다. 지난밤 영하의 수은주에 강의 가장자리마다 물이 얼어 하얀 피부를 드러낸 여인 같다. 수척하게 마른 여인이 얼음 같은 미소를 짓는 냉염(冷艶)한 모습인가. 가냘프게 흐르는 섬진강 줄기가 지리산을 끼고 돌아나간다. 지리산 자락마다 벌거벗은 활엽수들이 강한 생명력으로 다투어 잎을 피어 올릴 수 있는 강의 물줄기는 물소리를 숨긴 채 가파른 비탈에 선 나무들을 올려다보고 있다. 으스스한 한기가 서린 섬진강의 겨울 물줄기는 더는 버릴 것이 없는 선승의 눈빛으로 나무들을 이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소리 없는 강물이 화개장터를 돌아나가고, 쌍계사 범종소리 따라 계곡으로 접어들자 울긋불긋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건물과 간판들이 섬진강의 정취를 여지없이 깨트린다. 쌍계사 입구에 이르도록 음식점과 모텔들이 어지럽게 들어서서 계곡의 맑은 물을 오염시키고 있다. 쌍계사와 칠불사에 이르는 지리산 계곡은 옛날과 현재 그리고 승과 속이 혼재된 채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곳이다.

      장중한 지리산과 어울리지 못하는 건물들은 계곡과 단풍을 찾았던 사람들의 열정이 불탄 자리처럼 흉물스럽게 텅텅 비어 있다. 길옆으로 이어지는 벚나무 군락은 인간들이 쉴 새 없이 뿌리고 간 자동차의 매연과 소음 그리고 오물에 지쳤는지 혼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직 입춘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산비탈에는 차나무가 무더기무더기 군락을 이루고 있고 그 아래에는 찻집들의 한집 건너 들어서 있다. 찻집 사이를 지나 칠불사(七佛寺) 입구에서 이른다. 새로 지은 산문이 말쑥한 자태로 여행객을 맞는다. 일주문을 지나자 서쪽으로 칠불사의 건물이 언덕 위에 산뜻하게 보인다. 지리산 반야봉 약 800m 고지에 자리 잡은 칠불사는 삼국시대 초기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에 있었던 가락국(駕洛國)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구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 곳에 와서 수도를 한 후 모두 성불하였다고 해서 칠불사라고 불리운다고 한다.

      동국제일선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산문을 올려다보며 돌계단을 오르다가 절 마당으로 들어서니 왼쪽으로 아자방(亞字房), 앞으로 대웅전, 대웅전 옆으로 문수전, 문수전 옆으로 설선당, 그리고 방금 지나온 산문이 보설루이고 그 옆 종루의 이름이 원음각이다.

      절 마당에 서서 좌우로 돌아보니 아자방 굴뚝에서는 예스러운 연기가 피어오르고, 절 뒤로는 앙상한 가지들만 치켜세운 활엽수들이 늘어섰는데 높은 가지에는 까치집 몇 개가 헐렁하게 매달려 있고, 문수전에서는 스님의 염불소리가 고즈넉한 절간에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절을 새로 지었는지 건물지붕들이 고색창연한 모습이 아니고 산뜻하게 단장되어 있어 자세히 보니 구리로 만든 기와에 칠을 한 듯하다. 깊은 산중에 세월의 묵고 향기로운 모습으로 서 있는 곳이 절이 아닌가. 기왕이면 지붕에 전통의 기와가 오르고 세월이 흐르며 이끼가 퍼렇게 덮이며 고색창연한 모습이었면 더 정이 들지 않을까. 이 절이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주석하였다고 하니까 더욱 아쉬운 생각이 든다. 이끼가 번지며 날이 갈수록 고색 창연한 우리의 기와에서 우리 조상의 혼과 채취를 맡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서산대사를 생각하며 옛날 한 스님이 지었다는 시나 읊조리며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지리산 칠불암은

    신라 옛적 절이라

    처마는 기울고 기와는 부서져

    추운 겨울이면 얼음과 눈이 들고

    비 오는 여름이면

    부처님 얼굴에 이끼 돋아 축축하다.

    승려들은 모두 눈물 흘리고

    신도들은 재물 없어 민망해하네

    동서남북 풍찬노숙

    분주히 애써서

    지난여름엔 공장 시켜 기와 굽고

    올 겨울엔 법당 단장하여

    구담에 예불하니

    오분향 향기는 연찰에 통하고

    칠보등 불빛은 옥감에 비치네

        (섬진강 문화의 화랑에서. 신영훈)

     

      설선당 마루에 앉아 원음각 옆으로 비스듬히 바라보니 절 아래 늙은 나무와 잘 어울린다. 여기에서 카메라의 앵글을 고정하고 지금 보이는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으면 좋겠다.

      남쪽의 아자방(亞字房)으로 가서 구조를 보려고 하니 문에는 유리문을 달아놓았다. 이 아자방은 초기에 한 번 불을 때면 100일 가량 따뜻했다고 한다. 이 아자방은 유명해서 당나라까지 알려졌으며, 방 구조의 탁월한 과학성으로 인해 1979년 세계건축사전에도 수록되었다고 한다. 한데 이런 방을 방문객에게 개방은 하지 않고 큰 유리문을 통하여 들여다보니 안의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절은 아직도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듯하다.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비를 베풀었듯이 닫힌 문을 열어 한겨울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따뜻한 차라도 한 잔씩 나누어준다면 절과 중생의 관계가 훨씬 가까워지고 절의 문턱도 낮아져서 절을 찾은 사람들이 훈훈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굳게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혼자서 높은 선의 경지에 이르러 중생들이 이해하기 힘든 선문답이나 하면서 은둔하는 불자의 생활이 바람직하지 만은 않을 듯.

      절을 내려오다가 화개에서 찻집에 들어갔다. 차의 본고장에 와서 차 한 잔 의 맛을 음미한다는 것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겨울이라서 사람들이 거의 없고 찻집의 분위기도 썰렁하다. 차를 준비하는 주인아주머니도 겨울 강물처럼 단정하다. 차를 준비하는 동안 다기들을 둘러보니 가격이 30만원, 60만원씩이나 한다. 60만원씩이나 하는 다기를 사다가 차를 마실 형편이 아니니 그냥 눈으로 호사를 한다. 차 한 잔 마셔도 갖출 것 다 갖추고 격에 맞게 마시면 좋겠지. 우리의 차 문화가 귀족들의 한가하고 유유자적한 생활의 한 방편이었을 뿐 백성들의 삶에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었듯이 요즘에도 서민들이 격식을 갖추어서 차를 마시기는 어려울 것 같다.

      주인아주머니가 따라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며 우전차의 가격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자기들은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어 팔지 않고 단골들에게 20그램 정도를 파는데 4만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중에서 파는 100그램은 60만 원쯤 한다고 한다. 60만원이든 600만원이든 나하고는 먼 이야기라서 그냥 듣고 흘린다.

      차를 마신지는 8년쯤 되었지만 아직 차의 맛을 알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뒷맛이 좋고 몸에 좋다고 하여 마시는 나의 입맛으로는 차의 섬세한 맛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정약용의 다시(茶時) 한 수를 읽어보는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할 듯.

     

    벽돌로 만든 작은 차부엌은

    이화선풍(離火選風)의 형상이다

    차는 끓는데 산동(山童)은 졸고

    나부끼는 연기 스스로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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