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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구층암자와 흰 구름 가는 길지리산 2015. 4. 10. 15:13
구층암자와 흰 구름 가는 길
절 입구에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사천왕이 무섭다한들 인간보다 무서울까. 또 사람이 선하다 한들 절 마당에 서서 홀로 곱게 늙어가는 한 그루 백일홍만 할까. 화엄사 경내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지만 사람들의 언어도 각양각색의 공을 들인 얼굴들도 절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지붕의 곡선에 미치지 못한다. 화엄사를 한 바퀴 돌고나면 가슴 한켠으로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부처님과 석탑에 들인 사람들의 정성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긴 세월 동안 돌에 앉아 온화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부처님의 마음에 이르지 못할 것이니 그냥 처마 밑에 앉아 스님들의 염불소리에나 귀를 기울일 뿐.
절 마당을 지나 절 뒤편 끝까지 걸어 작은 문을 지나면 비로소 고즈넉한 건물이 나타난다. 구층암이다. 화엄사는 소문난 절이어서 사람들이 북적거리지만 작은 암자인 구층암을 찾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암자 마당에는 온전하지 못한 석탑이 서 있다. 언제부터 그런 모습인지 모르지만. 비로소 토방에 가지런히 놓인 스님의 흰 고무신이 눈에 들어온다. 석탑을 지나 뒷마당으로 가면 마루 앞 기둥에 눈길이 머문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기둥이다. 굽고 휘어진 나무를 다듬지 않고 생긴 본래의 모양대로 기둥을 만들었다. 나무가 모자라서 그랬을 리는 없고 대목수의 높은 식견이 파격의 조화와 미를 창조해 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마루에 앉아 암자의 적막한 사위 속에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본다. 순간이지만 치열하게 수행 중인 스님처럼. 하지만 속인의 그런 마음은 오래가지 못하고 일어선다.
암자를 나와 길을 따라 위로 조금 걷자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돌로 바닥을 깐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늙은 소나무와 참나무에서 오랜 세월 ― 어쩌면 임진왜란과 6.25의 참상 등을 지켜보며 이 땅에서 고통 받았을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공유하며 받았을 상처들이 툭툭 불거진 혹들로 변한― 길을 따라 걷는다. 하지만 나무들은 말이 없고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바람이 소나무와 활엽수 잎들을 스치는 소리, 햇빛이 나무 사이를 들추고 들어오는 소리, 풀과 구름이 수런거리는 소리를 느끼며 한참을 더 걷는다. 큰길에 다다르자 왼쪽으로 연기암이 보이고 그 바로 앞에 카페가 손짓을 한다.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앉아 창을 통해 쌍둥이처럼 나란히 선 앞산의 두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커피가 나왔다. 숲속에서 마시는 커피의 맛은 어떨까. 카페의 이름대로 ‘흰구름 가는 길’에 드리운 무욕, 무상의 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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