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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연곡사 부도 앞에 서서지리산 2018. 1. 19. 14:48
지리산 연곡사 부도 앞에 서서
지리산 피아골로 산행을 하려면 피아골 초입에서 연곡사를 만나게 된다. 피아골을 사람들이 많이 찾을 때는 여름철 시원한 계곡물에서 피서를 할 목적으로 오는 경우와 가을철 피아골 단풍을 구경할 때다. 물놀이가 목적이든 단풍을 구경하든 어차피 지루한 일상의 반복에서 벗어나려는 잠시 휴식일진데 연곡사에 들렸다 가기를. 대웅전 뒤로 돌아가면 국보인 두 탑(부도)을 만날 수 있다.
「토지」를 읽었다면 윤 씨 마님, 김개남, 구천, 길상, 우관스님 등의 주요 인물이 살거나 인연을 맺은 이곳 연곡사에서 다시 그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다 스러져가고 남은 건 몇 개의 돌탑 뿐. 허허롭고 공허한 인간의 생을 지금 살아있다고 한들 영원할 리는 없고. 살다가 그저 스러져 가는 게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탑(부도)에 대해서 전문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가는 게 목적이 아닌 다음에야 탑의 세세한 부분에 대한 이름과 의미 등을 알고 갈 수는 없을 것이고. 탑 가까이 가서 탑신과 옥개석에 손을 가만히 올려놓고 손으로 전해오는 느낌이라도 있다면 절을 찾은 작은 소득은 얻지 않았을까. 처음 탑을 세울 누군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테지만 기록조차 없는 걸 보면 ‘내 이름을 남기지 마라’고 유언이라도 했을 고승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지.
이름마저도 남겨놓지 않은 부도를 떠나며 이런 시라도 외워보면 어떨까.
묘지 頌
고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그대 자손은 차례차례로 오
리라.
지난밤 모든 벌레 울음 뒤에 하나만 남고 얼마나 밤을
어둡게 하였던가.
가을 아침, 財寶인 이슬을 말리며 그대들은 잔다.
햇빛이 더 멀리서 내려와 잔디 끝은 희게 바래고
올 이른 봄의 할미꽃 자리 가까이 며칠 만의 산국화가
모여 피어 있구나.
그대들이 가졌던 것은 비슷비슷하게 사라지고 몇 군데
의 묘비는 놀라면서 산다.
그대들이 살았던 이 세상에는 그대의 뼈가 까마귀 깃
처럼 운다 하더라도
이 가을 진정한 슬픈 일은 아니리라.
오직 살아 있는 남자에게만
가을은 집 없는 산길을 헤매게 한다.
그대들은 이 세상을 마치고 작은 際日 하나를 남겼을 뿐
옛날은 이 세상에 없고 그대들이 옛날을 이루고 있다.
어쩌다, 잘못인지 노랑나비가 낮게 날아가며
이 가을 한 무덤 위에서 자꾸만 저 하늘에 어떤 하늘
이 있다고 일러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그대들은 이 무덤에 있을 뿐
그대 자손은 곧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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