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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곡 섬진강의 코스모스평행선 눈 2018. 11. 19. 20:23
석곡 섬진강의 코스모스
가을이 점점 깊어 가고 있다. 그 깊어 가는 가을은 어느 계절에서도 느낄 수 없는 영혼을 두드리는 선물로 다가온다.
덥고 눅진눅진한 여름철 날씨에 몸과 마음이 지쳐 있다가 상큼한 바람이 스치면 건조한 사막에 비가 내리면 일시에 생명이 살아나듯이 내 몸도 가뿐하게 회복된다. 정신까지도 흐릿하고 멍하게 했던 무더위가 물러나며 가을을 알리는 것들과 만나게 된다.
우선 새벽 공기가 습윤한 기운을 벗어버리고 아삭아삭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검은 장막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에 숲으로 가면 몸에 닿는 이슬의 감촉이 다르다. 봄의 이슬은 여리고 순한 느낌, 여름의 이슬은 비만하고 풍요로운 느낌이지만 가을의 이슬은 몸에 묻어도 그 무게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야위고 맑은 느낌이다.
맑고 얇은 이슬에 채이며 새벽 숲길을 걷노라면 하늘은 사파이어 같은 색감과 셀로판지처럼 투명한 빛으로 다가온다. 정성들여 닦아놓은 듯, 깊은 사색으로 고뇌를 씻어낸 듯, 기도로 밤을 지새워 맑아진 듯, 면벽하고 명상하여 무소유의 경지에 이른 듯 청미하고 순정한 모습이다.
푸른 대지를 밟고 살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많지 않은 날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처럼 쾌청한 가을날 일요일이다. 사람들에게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석곡에 있는 섬진강 코스모스 길을 찾아갔다. 호남고속도로 석곡 인터체인지로 들어서서 섬진강 쪽으로 가자 강둑에 코스모스가 보인다. 차에서 내리니까 코스모스는 더욱 선명하게 하늘거리고 있다.
좁은 강둑길을 따라 양옆으로 코스모스를 심어 가꾸어 놓았다. 코스모스 길을 따라 걸으니 바로 옆에도, 멀리 시선이 아득한 곳까지도 잔잔한 수면에 빛나는 노을 같은 코스모스가 피어 있다. 어쩌다 들른 바람이 여리고 긴 코스모스를 조심조심 흔들어 놓는다. 인간이든 꽃이든 제 중심을 잃지 않고 흔들리며 때로는 대지 가까이 몸을 기웃한다는 것은 꼿꼿하고 엄정한 것들에 대한 얼마나 멋진 풍자이고 어긋나기인가.
은박지 같은 수면 위에 꽃물이 들어 아른거린다. 억새도 나무도 강물에 드리운 제 그림자를 보며 나르시스에 젖어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이다. 여리고 맑은 꽃잎들이 짙푸른 하늘에 엉기고 섞인 채 지미(至美)한 빛으로, 색으로 수를 놓고 있다.
장엄한 백두대간이 마감하는 남도의 끝자락 남해를 목전에 두고 장중한 지리산이 우뚝하게 이웃한 너른 곡성 벌판을 굽이굽이 돌아 섬진강이 흐른다. 남원, 곡성, 구례, 하동을 지나 남해로 흐르는 길목 석곡 섬진강에 사람들은 강물에 반하고, 코스모스에 취하고, 가을들에 감탄하고, 하늘빛에 순화된 채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어 코스모스 심어진 길을 따라 흐른다.
아이들이 코스모스를 따라 꽃처럼 하늘거리며 꽃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꽃처럼 아름다운 아이들, 아이들처럼 청순한 코스모스……. 10월 초순의 햇살을 받으며 강둑에 앉는다.
야위어 가는 섬진강
가슴을 풀어헤친 채
부끄러움 없이 누워
희뿌연 속살
졸음이 올 때까지 보아도
괜찮다는 듯
허술한 원두막 비워두었다.
강둑에는
코스모스
무명실처럼 가녀린 목이
무수히 돋아 올라
선연한 꽃잎들
예닐곱 살 아이들
좁은 꽃길을 달리며
조약돌 같은 웃음소리
강물에 그림자로 남고
강둑 너머
소름이 돋는 하늘에
꽃잎이 아른거린다.
한낮이 가까웠는데
청녀(淸女)의
차가운 체온
오싹한 한기
청람으로
더 푸르러
착하고 여린
섬진강 물위에
부신 햇살 옹알이를 한다.
어눌한 말더듬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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