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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그리던 금강산(2002년 8월)평행선 눈 2018. 9. 19. 12:46
꿈에 그리던 금강산(2002년 8월)
어린 시절 ‘금강산 찾아가자 일 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를 부르며 자란 후 어른이 된 지금 이 노래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세계 제일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는 금강산은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산이다. 하지만 남북이 분단된 후 세월이 흐르며 금강산은 가볼 수 없는 꿈속의 산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햇볕 정책이 추진되며 남북이 제한적이나마 화해와 교류의 실마리가 트이기 시작하였다. 남북한이 각기 동상이몽을 꿈꾸며 대화를 시작한 후 첫 결실 중 하나가 금강산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협이나 무기 문제가 아닌 순수한 민간인들의 여행은 남북 화해의 단초가 될 수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북한은 부족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고, 남한은 민간인들이 정치적 입장이 아닌 관광의 목적으로 입북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8년 11월 처음으로 900여 명의 관광객이 북한의 장전항에 설레는 마음으로 첫발을 디딜 수 있었다.
꿈에 그리던 금강산 관광이 처음에는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지만 삼 년이 지나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관광이 중단될 위기에 빠졌었다. 관광의 대가로 6년 동안 9억 달러가 넘는 달러와 한 사람의 관광객이 갈 때마다 200달러 씩 내야하는 입북료, 보수 신문들의 햇볕 정책과 금강산 관광 물어뜯기로 인하여 금강산 관광은 더 이상 지속하기가 힘들게 되었었다. 그러자 정부에서 교사와 학생들에게 여행 경비를 지원해 주는 정책을 한시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그 덕택에 나도 금강산을 관광할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막상 금강산에 가야할 날이 가까워지자 가도 될 것인가라는 고민에 빠졌다. 한 달 전 서해에서 남북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터졌다. 1999년에 이어서 다시 발생한 교전으로 남북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가족들은 슬픔에 쌓여 있는데, 금강산 관광의 호사를 누린다는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또 갑작스런 호우로 인하여 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에 홍수 경보나 주의보가 내려졌고, 많은 사람이 실종되거나 죽는 불행이 겹쳐 일어났다. 강이 범람하면 삶의 터전이 유실되고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금강산 관광은 너무 사치라는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다. 언론에서 지방 자치 단체의 장들이 호우가 내리는데 휴가를 간 채 자리를 비운다고 곱지 않은 기사를 쓰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의 입장에서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교사들이 방학 중에 단체로 여행 경비를 지원 받아 금강산 여행을 간다고 하면 역시 곱지 않은 생각을 할 것 같았다. 여러 차례 생각을 하다가 다시 이런 기회가 올 것 같지도 않아 무거운 생각들을 버리고 짐을 꾸렸다. 8일 밤 영시 학교 운동장에서 속초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집을 나서는데 비가 그치지 않고 내렸다. 여러 가지 심란한 생각에 비까지 겹쳐 더욱 울적한 마음으로 금강산 여행에 나섰다. 비가 내리는 고속도로를 7시간 넘게 달려 속초항에 도착하여 설봉호에 승선하였다.
배에 승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강산 관광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즐거운 여행이 아니고 금지와 하지 마 여행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모든 승객이 방북 교육을 받으며 또 30명 단위로 모여서 여행 가이드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에 대하여 반복하여 들었다. 긴장감을 자아내는 엄포성 안내를 들으며 느끼는 당혹감으로 인하여 배 안에는 들뜬 여행의 즐거움보다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2008년 7월 한 여성 관광객이 북한군에게 피살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해가 가지 않은 건 사전에 북한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에 대하여 그렇게 교육을 받았는데 새벽에 왜 혼자서 군사구역으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배는 직선으로 가지 않고 공해로 나와서 북쪽을 향했다. 세 시간이 지나자 북한 땅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산과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가보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땅이었다.
처음 내 눈으로 보는 북한의 모습은 적적하고 한적했다. 바다도, 땅도, 나르는 갈매기도, 구름도, 갑판을 적시는 비도 내가 50년 동안 바라보고, 숨쉬고, 밟은 그 땅, 그 모습 그대로 였다. 설봉호에서 내려 장전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살아생전 언제 북한 땅을 밟아볼 수 있을까했던 기대와 꿈이 실현된다는 벅찬 환희가 느껴진다. 반세기 넘게 원수가 되어 죽이고 증오하며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경직되어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생생한데 북한 땅을 밟는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많은 여행객들이 움직임이 정지된 듯 아무 소리나 움직임도 들리지 않는 감각이 마비된 한 착각에 빠진다.
검색대를 통과하여 긴 줄에 서서야 비로소 여기가 북한 땅임을 실감하게 된다. 검색대를 통과하여 바로 곁에 있는 바다 위에 있는 호텔 해금강호에 승선하여 짐을 풀었다. 주변에는 보초를 서는 군인 외에는 북한 사람의 모습이나 다른 건물을 볼 수 없는 을씨년스런 모습이 황량함을 주고 있었다. 남한의 관광객을 위하여 마련한 제한된 공간에서 느끼는 북한 땅의 첫 느낌은 스산하고 음산하였다. 거기다 비까지 그치지 않고 내리니 온통 무채색으로 물들어 암울한 느낌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잠시 후 버스에 올라 온정각으로 갔다. 남한의 여행객이 머무는 유일한 장소였다. 식당과 휴게실 그리고 문화회관이 있었다.
온정각 주위의 산들이 예사롭지 않다. 비와 안개 속에 앞뒤로 보이는 산은 여기가 빼어난 금강산 초입임을 알려준다. 높지 않은 산에 바위가 서로에게 기대며 서로 껴안기도 하고, 등에 업기도 하고, 얹히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바로 서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하였는데 하나같이 봉우리를 향하여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그리고 온천장 앞 바위산 가파른 벼랑에 운무에 둘러싸인 채 서 있는 소나무의 모습이 바로 빼어난 산수화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다.
(온정각 주변 모습)
155마일 휴전선을 경계로 하여 온갖 무기로 무장한 채 서로를 주시하며 긴장감 속에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북한 땅 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민족 분단의 비감과 북한 땅에 있다는 야릇한 긴장감으로 인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자는 듯 마는 듯한 채 날이 밝았다. 기다리던 금강산 관광을 가는 날이다. 온정리 휴게소에서 버스를 타고 만물상 입구 만상정 주차장으로 향했다. 온정천을 지나 한하계곡으로 접어들자 빽빽한 적송이 좌우로 들어서고 시원스런 물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길은 소형 버스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길로 양방 통행이 불가능한 좁고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이다. 버스가 덜컹거리지만 천하의 명산 금강산을 보러 가는데 그 정도 불편이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차창으로 보이는 울창한 숲과 연달아 이어지는 봉우리와 계곡 사이로 폭포도 보인다.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가며 아름다운 금강산을 온몸으로 느끼며 가고 싶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버스는 40여 분을 달려 만상정 주차장에 닿는다.
비로소 금강산의 공기, 바람, 물소리에 온몸의 촉수들이 머리를 들고 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체내에 금강산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여기가 바로 꿈속에서도 그리던 금강산이다. 좁은 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왼쪽으로 날카로운 창 세 개를 꼽아 놓은 듯한 봉우리가 보이는데 삼선암(三仙巖)이다. 운무에 가려 서 있는 봉우리 어디에서 신선들이 동자에게 차를 끓이게 하고 바둑이라도 한 수 두는 것인지 아니면 빗소리를 들으며 낮잠이라도 자고 있을 것 같은 빼어난 풍경이다.
삼선암을 지나며 귀면암(鬼面巖), 천녀봉(天女峰)으로 이어지며 봉우리들은 점입가경 절경을 이룬다.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깎아지른 단애와 봉우리 어느 것 하나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고, 감탄을 자아내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불러도 좋을 아름다운 산이다. 다만 비와 안개에 가린 봉우리들이 가까이 가야 모습을 드러내서 시야를 좁히니 그게 아쉬울 뿐이다. 안개 속 저편에서 빼어난 자태를 연출하고 있을 봉우리를 볼 수 없다. 하지만 명산 중의 명산인 금강산이 그리 쉽게 모습을 보여줄 리가 없다. 헤프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금강산의 품속에서 촉촉하게 파고드는 빗줄기와 함께 희열에 젖는다.
관광 가이드는 길을 재촉하고 뒤에 오는 사람들은 자꾸만 밀고 오니 주변을 자세히 볼 수가 없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를 금강산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데 비는 내리고 좁은 길에 사람들은 북적이니 그마저 쉽지 않다. 사람들에 떠밀려 오르니 곧바로 절부암(折斧巖)이 나타난다. 눈앞에 펼쳐지는 바위들이 수직으로 서고, 가로로 쌓이고, 등에 업기도 하고, 품에 안기도 하고, 가냘프게 휘기도 하고, 날렵하게 비상하고, 의연하게 정좌하고, 위태롭게 매달리기도 하며 풍우에 깎이고 다듬어져 온갖 형상을 연출해 낸다. 다람쥐바위, 새바위, 뱀바위 등 하늘을 떠받치기라도 할 듯 치솟은 봉우리들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규격화된 모습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변화하고, 쌓고 깎이며 거기다 세월의 흐름까지 고스란히 담아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어서 감탄만을 자아낸다. 만물상이라는 명성 그대로 빼어난 모습에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절부암을 지나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르니 망양대(望洋臺)가 가파르게 서 있다. 봉우리에는 온통 사람들이 들어차서 발 디딜 틈도 없다. 한쪽으로 비켜서서 왼쪽으로 보이는 봉우리들을 바라보다가 카메라에 담으려는데 비와 안개에 가려 지척을 벗어나면 그저 운무에 쌓인 봉우리가 어렴풋이 보일 따름이다. 톱날처럼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첩첩이 이어지다가 운무에 쌓여 꿈속처럼 희미해지며 시야를 가린다. 아무래도 이번 금강산 여행은 분단과 대결의 아픔이 서리서리 맺혔다가 눈물로 흐르나 보다.
망양대를 내려와 마지막 목적지 천선대(天仙臺)로 향하는데 길은 가파르고 경사가 심해서 사람들이 서로 비껴가기가 힘들다. 오른쪽으로 죽순 같기도 하고, 잎 진 활엽수의 숲 같기도 한 석벽과 봉우리들이 막고 서 있다. 잠깐 숨을 고르는데 석벽 아래에서 약수가 솟는데 망장천(忘杖泉)이다. 이 물을 마시면 힘이 솟아서 지팡이를 버리고 간다고 하여 망장천이라 한단다. 서너 뼘이나 겨우 될까 말까한 곳에서 가는 명주실 같은 물이 솟는다. 그 작은 샘에 비가 내리니 빗물이 함께 섞여 오늘은 바위와 하늘에서 물이 솟으니 천석천(天石泉)이라고 불러 볼까.
망장천을 지나 수직에 가까운 쇠사다리를 타고 오르니 홀연히 머리 위에 바위가 내려 누르는데 그 사이로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틈이 보인다. 두어 길쯤 되어 보이는 공간으로 들어서니 앞으로 탁 트인 하늘이다. 이름이 하늘문이다. 앞을 바라보니 보이는 것은 비와 안개의 바다 속에 흐릿한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봉우리들, 여기에 서면 비로봉도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다가선 바로 앞모습만 겨우 보여준다.
여기서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한 걸음도 더 갈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한 마음을 가눌 수 없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빗줄기가 저 멀리 금강산을 바라보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기도로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천지신명이시여! 어서 빨리 민족이 하나 되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저려오는 이 아름다운 산을 남과 북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찾아올 수 있게 하여주소서. 이념이나 체제보다는 민족과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원점으로 돌아가 화해하고 양보하여 50년이 넘도록 벽을 쌓고 살아온 이 땅의 사람들에게 만남의 길을 열어주소서. 뜨거운 민족애로 모든 걸 녹여 손에 손을 잡고 한 형제가 되어 이 아름다운 산에서 만나게 하여주소서.
2018년 9월 19일 현재 문재인 태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있다. 하루 빨리 남북 관계가 개선되어 관광과 교류가 활성화 되고, 신뢰가 쌓여 한반도에서 긴장이 완화되었으면 좋겠다. 또 경협도 다시 재개되어 서로가 윈윈 하는 기회가 되어 경제가 도약하는 계기가 되기를 염원한다.
(만물상 주변 모습들)
(해금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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