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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눈이 부시지 않은영화. 드리마 2019. 3. 21. 15:14
‘눈이 부시게’는 눈이 부시지 않은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눈이 부시지 않은 삶에 대한 반의어이고 늙음에 대한 회한이 아닐까?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새벽 한기가 목덜미로 파고드는 3월, 할머니가 다세대주택 쓰레기장에서 폐지를 주워 손수레에 싣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노후대책 없이 맞은 황혼. 추위에 떨며 새벽부터 온종일 폐휴지를 주워서라도 연명해야 하는 신산(辛酸)한, 상대적 가난이 아닌 절대적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 버겁고 힘겨운 일상을 온몸으로 버티고 살면서도 불만이나 불평을 할 처지도 되지 못하는 묵종(黙從)의 삶도 ‘눈이 부시게’의 다름이 아닌 삶일까? 섬세한 감성으로 깊이 바라본다면.
‘눈이 부시게’는 혜자가 시계를 잘못 돌려 갑자기 찾아온 일흔 살로 세월을 건너 뛴 타임머신 드라마일까. 그런 타임머신 속을 여행하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판타스틱(fantastic) 드라마일까.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아니었다. 혜자의 고백.
“나는 알츠하이머 환자입니다.”
이 장면에서 비로소 아리송했던 장면들에 대한 퍼즐이 완성되는 걸 느꼈다. 드라마에서 생뚱맞고 이해가 가지 않았던 장면들, 예를 들면 준하를 구출하는 장면에서 보여준 노인들의 람보 같은 행동들이 혜자의 ‘나는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독백을 통해 조각난 퍼즐들이 제 자리를 찾는다. 치매 환자의 기억 속에 과거로의 여행은 그다지 유쾌한 눈이 부신 일상이 아니었다. 남편은 고문을 받다 죽었고, 아들은 교통사고를 다리를 잃어 장애인이 되고, 장애인이 된 아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 없는 아픔 등을 회상으로 그려낸다.
회상은 추억 속의 불쾌했던 일들도 아름다운 환(幻) 세계로 만들어주는 진정제(鎭靜劑) 같은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혜자의 이런 독백이 드라마를 보는 내게 마음에 진하게 와 닿는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은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혜자의 회고 속에 밝혀진 삶은 꽃길이 아니었음에도 눈이 부신 까닭은 이런 철학적 의미가 있지 않을는지.
‘회고하는 내레이터는 사태의 단순열거나 데이터의 무심한 수집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사태의 이런저런 각도에서 여러 번 곱씹으며,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자신의 해석학적 틀 속에 전부를 용해시킴으로써 이를 의미화하게 되는데,’ (「철학으로 영화보기 영화로 철학하기」김영민)
오랜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김혜자의 연기는 명불허전, 변함이 없었다. 한층 더 완숙한 깊이가 느껴지는 25살, 70살 그리고 치매가 든 노인의 눈매를 연기하는 능청스러움과 진진함에 감동이 더해진다. 액션은 표정보다 역동적인 움직임이 필요하겠지만 깊은 삶의 농도를 표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눈빛에 있다고 믿는다. 그의 눈빛은 시청자들에게 늙음, 병 그리고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치한 연기를, 그래서 현실인지 허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착각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연기였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우린 지금 모두가 혜자의 늙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 시간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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