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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짓(녹차 만들기)시골집 2015. 4. 22. 11:19
빌어먹을 짓(녹차 만들기)
지난겨울은 큰 추위가 없었고 늦추위도 오지 않아 봄이 빨리 왔다. 다른 해에는 곡우가 되어도 녹차 새싹을 따서 차를 만드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좀 더 지나야 가능했다. 그렇지만 올해는 곡우가 이틀 남았는데 녹차의 새잎이 제법 돋아났다. 아침도 먹지 않고 새로 돋은 잎을 따려고 아침 일찍 뒤꼍으로 갔다. 허리를 굽히고 새로 돋은 잎을 하나씩 따기 시작한다. 한번에 새잎 둘을 딸 수 없는 일이고 단순하고 지루한 작업이지만 새로운 녹차를 만나기 위해서는 꾹 참고 한 잎 한 잎 따는 수밖에. 지리산에서 어둡고 깜깜한 밤을 뚫고 달려온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와 친구가 되어준다.
세 시간 넘게 작업했지만 새로 돋는 잎이 아직은 너무 작아 소쿠리에 겨우 반을 넘었다. 그래도 다른 해에 비해서는 많은 편이라서 흐뭇하다. 물에 씻어 물기를 없애기 위해 그늘에 잠시 펼쳐놓는다. 대량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씻지 않고 하지만 내가 먹을 적은 양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물기가 마르자 덖을 준비를 한다. 솥, 키, 가스랜지를 준비하고 덖기 시작한다. 가마솥을 걸어놓고 하기도 하고, 덖는 기계로도 하지만 소량이라서 그럴 필요가 없다. 덖어서 비빌 때도 덕석을 쓰기도 하지만 덕석 대용으로 키를 쓴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차를 덖는 온도가 차맛을 결정하고, 어떻게 비비느냐가 차가 우러나오는 시간을 결정한다.
커피를 볶을 때도 시나몬 로스팅(가장 약하게 볶기)부터 풀시티 로스팅(가장 강하게 볶기)까지 다섯 단계(여덟 단계로 나눈다고도 함) 가 있듯이 녹차도 온도에 따라 고소한 맛이 나기도 하고, 풀맛(녹차 본래의 맛)이 나기도 한다는 걸 몇 년 동안 반복하다가 알게 되었다. 나는 처음 세 번은 조금 강하게 덖어 비비고, 그 다음부터는 아주 약하게 덖고 비비지 않는다.
녹차 명인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책에서 혹은 텔레비전 등에서 그런 사람들을 소개하는데 나는 내 입맛에 맞게 만들 뿐이다. 명인이 만든 차가 명차가 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다고 믿지 않는다. 사람들의 입맛이 다 다른데 모든 사람에게 가장 좋은 보편적인 맛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가 다 만들어졌다. 지난겨울 차는 어떤 맛을 숨겨두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차를 마실 때도 편한 자세로 느긋하게 마신다. 일본사람들이 다다미방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틀에 박힌 격식에 따라 마시는 걸 상상해 보면 숨이 막힌다. 가장 편안한 마음과 자세로 마셔야 차맛이 향기롭지 않을까. 올해 차와 처음 만나는 즐거운 시간이다. 설레는 첫사랑처럼.
빌어먹을 짓이라고 한 까닭은 몇 년 전 차 만드는 걸 같이 한 친구가 차가 마지막으로 완성되었을 때 한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정말 빌어먹을 짓이네!”
그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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