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봄비를 듣다
    시골집 2019. 3. 11. 12:52

     

     

    봄비를 듣다

     

     

              일주일 동안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로 시달렸다. 해마다 미세먼지로 시달리는 날이 많아지고, 미세먼지의 농도도 진해지고 있다. 절망적인 미래 인류의 종말을 그리는 영화처럼 절망스런 수준이다. 혼탁하고 흐린 하늘을 바라보고 느껴야 하는 마음도 칙칙하고 혼몽하기 그지없다. 인간들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영영 끝나지 않을 듯한 하늘이 토요일 자정을 지나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깨끗이 씻겨 지는 듯하다.

     

       일요일 새벽 잠결에 얇은 문종이에 빗소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렴풋하고 작게 들리던 소리가 첫새벽이 가까이 오자 점점 크게, 성글었던 소리가 조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걸어오던 비가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듯 성마르게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방문 툇마루 옆 장작더미를 덮어놓은 비닐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반갑다. 미세먼지를 씻어 내리는 반가운 선물이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무수히 떨어지는 빗소리가 각기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다른 소리를 가지고 있다. 느긋한 소리, 성급한 소리, 칼칼한 소리, 걸쭉한 소리, 허스키한 소리, 달콤한 소리, 무심한 소리, 냉정한 소리, 앙칼진 소리, 부드러운 소리, 높은 소리, 낮은 소리가 섞이며 교향악을 만들어 내고 있는 듯하다.

     

       마당 새싹을 밀어 올리려고 온 힘을 쏟고 있는 잔디에도, 화단에 한창인 청매화, 홍매화, 적매화에도, 백목련과 자목련에도, 목이 말랐던 소나무에도 빗방울이 떨어지며 각기 다른 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모든 소리들이 어울려 미세한 문종이의 틈 사이를 지나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새싹과 꽃을 부르는 소리이고, 얼었던 동토를 녹이는 빗소리가 잠을 깨운다.

     

       봄비!

       유튜브를 켜 봄비 노래를 듣는다.

       김정호에 빗속을 둘이서를 먼저 듣는다. 감정의 과잉분출을 억제한 듯한 목소리가 봄비에 섞인다. 한영애의 봄비가 흐른다. 눈물이 되었다는 가사를 영혼을 담은 듯한 울림을 주는 목소리가 빗물처럼 흐른다. 목소리나 분위기가 기존의 틀과 가치를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전위적인 목소리가 파고든다이은하의 봄비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에 봄비가 되어 돌아온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간절하다 봄비를 노래하는 가사들 다 사랑인데 그 사랑들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미세먼지를 씻어내는 봄비는 세상의 먼지만 씻어내는 게 아니고 내 마음의 우울도 함께 씻어낸다.

     

     

       날이 밝았다. 마루에 들여놓았던 고무신을 토방에 가만히 내려놓고 맨발을 집어넣는다. 아직은 차갑다. 오봉산이 깨끗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지리산도 가까이 보인다. 봄기가 미세먼지를 씻어 내린 덕이다. 오랜만에 마음껏 공기를 들이 마신다. 후하고 내뿜으니 허연 김이 빠르게 물에 젖는 공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화단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매화는 비를 맞아 선명한 채 지고 있고, 살구나무 가지에 꽃들이 한층 붉어진 꽃봉오리들을 키우고 있다. 꽃봉오리마다 빗방울을 달고 있다. 투명한 진주를 하나씩 머금고 있는 듯하다. 금방이라도 부풀어 오를 기세다.

    크로커스가 있는 감나무 아래로 갔다.

     

      아!

       그제는 서리를 맞고 수줍은 봉오리를 터뜨릴 기세더니 봄비를 맞고 한결 단아한 모습이다. 작고 여린 봉오리 어디에 저리도 찬란한 아름다움과 자태를 간직하고 있을까? 섬세한 마음 어디에 불 같은 맑은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가 찬 서리를 맞으며 꽂대궁을 밀어 올리고, 다투어 피는 꽃들 다 밀어내고 맨 먼저 꽃을 피우는 걸까? 꽃봉오리에 빗방울을 머금고 피는 모습은 처음 경험이다. 자연의 신비스러움은 이런 게 아닐까. 가만히 크로커스 옆에 앉아 함께 비를 맞는다.

     

         빗소리

                                            장석남

     

    새벽녘에 빗소리 들렸다

    부스럭대며 일어나 베란다에 나간다

    비 들이치지 않을 만큼

    바깥창 기울여 닫고

    뒤창에 가 또 닫고 다시

    들어와 문 닫고 앉았다

    빗소리 들리지 앉는다

               (빗소리 일부)

     

     

     

     

     

     

     

     

     

     

    '시골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원주택과 푸른 잔디 마당  (0) 2019.09.23
    지리산 9월 첫날 새벽  (0) 2019.09.04
    귀촌과 귀농  (0) 2018.07.01
    빌어먹을 짓(녹차 만들기)  (0) 2015.04.22
    진달래꽃 화전  (0) 2015.04.07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