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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화
안도현
생명이 요동치는 계절이면
넌
하나씩 육신의 향기를 벗는다.
온갖 색깔을
고이 펼쳐 둔 뒤란으로
물빛 숨소리 한자락 떨어져 내릴 때
물관부에서 차 오르는 긴 몸살의 숨결
저리도 견딜 수 없이 안타까운 떨림이여.
허덕이는 목숨의 한 끝에서
이웃의 웃음을 불러일으켜
줄지어 우리의 사랑이 흐르는
오선의 개울
그곳을 건너는 화음을 뿜으며
꽃잎 빗장이 하나 둘
풀리는 소리들.
햇볕은 일제히
꽃술을 밝게 흔들고
별무늬같이 어지러운 꽃이여,
이웃들의 더운 영혼 위에
목청을 가꾸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수선화
이해인
초록빛 스커트에
노오란 블라우스가 어울리는
조용한 목소리의
언니 같은 꽃
해가 뜨면
가슴에 종(鐘)을 달고
두 손 모으네
향기도 웃음도
헤프지 않아
다가서기 어려워도
맑은 눈빛으로
나를 부르는 꽃
헤어지고 돌아서도
어느새
샘물 같은 그리움으로
나를 적시네창포
신동엽
축축한 찬비는 주룩주룩 나리는데
찬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이고
남색 외로운 창포만 바라본다.
빗줄기 속에 떠올랐다간 조용히 숨어 버리는
못 견디게 그리운 모습
혈맥을 타고 치밀어오는 애수 고독 적막
눈물이 조용히 뺨을 흘러나린다.
찢기운 이 마음 우수 짙은 빗줄기 속을 방황하는데
한결 저 꽃에서만 설레이는 이 가슴에
정다운 속삭임이
아아, 마구 뛰어나가 꽃잎이 이즈러지도록
입술에 부벼 보고 싶고나
미칠 듯이 넘치는 가슴에
힘껏 눌러보고 싶고나.동백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해바라기
윤보영
밤새 그립던 마음
감추다가
뒤돌아 본 해에게 들켜
고개 숙인 해바라기 앞에서
내 안의 그대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더 쫓아가야
그대가
뒤돌아볼까 하고.
꽃 대가리
신동엽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숲 속에서
자라난 꽃 대가리.
맑은 아침
오래도
마셨으리.
비단 자락 밑에
살 냄새야,
톡 톡
두드리면
먼 상고까장 울린다
춤 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
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 타작 소리.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삼한 적
맑은 대가리.
산 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장미와 가시
김승희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 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봉숭아
도종환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벚꽃 피는 밤
정태현
벚꽃 만개한 날 밤
하늘 가득 달님도 만월인데
완숙한 봄밤의 고요는 깊어가고
잠들면
이대로 좋은 꿈이라도 있을 것 같은 황홀함이
어둠의 적막을 타고
개울마냥 흐를 때
야간열차의 기적소리가
벽창호를 가르듯
긴 여운을 남기면...
아무데도 마음 줄데 없는
나는 어이해
행여나 저 꽃잎 흩날릴까
마음 졸여
온밤을 홀렸네들국화
곽재구
사랑의 날들이
올 듯 말 듯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
그래도 가슴속에 남은
당신의 말 한마디
하루종일 울다가
무릎걸음으로 걸어간
절벽 끝에서
당신은 하얗게 웃고
오래 된 인간의 추억 하나가
한 팔로 그 절벽에
끝끝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르지 않은 꽃은 낙화가 되었다
부르지 않은 꽃은 낙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