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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의 정자를 찾아 1그곳에 가면 2020. 12. 7. 11:42
코로나19로 암울한 시기 사람이 올 것 같지 않은 담양의
정자를 찾아갔다. 텅 빈 원림에서 솔잎에 머무는 찬바람
이 반가울 것 같았다.
담양에는 조상들이 만든 29개 정도의 정자가 있다고 한다.
정자는 옛날 선비들이 모여 시를 논하고,
정치를 논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였다. 이런 전통이
오늘에 이어져 어느 마을에나 마을 입구에 모정이 있다.
정자가 옛날 선비들의 고급스러운 생활의 장이었다면
모정은 백성들이 농번기에 더위를 피해 일을 하다가 잠깐
쉬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도시에도 노인정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장
소가 되고 있다.
정자는 원림(園林)과 따로 떼어내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담양의 정자를 여행한 경
험이 있다면 정자는 평지가 아닌 경관이 좋은 언덕이나 동산
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자에 올라 마루에
앉아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탁 트인 시원함을 느낄 수 있고
정자 주변에는 거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나 천(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자는 이처럼 경관이 좋은 곳에 지어 선비
들이 문학, 학문, 정치를 논하며 유유자적하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원림이라는 말이 익숙한 말은 아니다. 유홍준은 이렇게 설명
하고 있다.
원림(園林)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의미와 미학이 더욱 깊어
진다. 원이란 일종의 정원이라고 해야겠는데 원림과 정원의
뜻은 사뭇 다르다. 정원(庭園)이라는 말은 명치시대에 만들어
낸 것으로 우리에게 식민지 시대에 이식된 단어이다. ----
정원이 일반적으로 도심 속의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작업을
통하여 동산〔園〕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
옛날에는 성밖〔城外〕-에서 동산〔園〕과 숲〔林〕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78쪽」
정자에는 일반 마을에서 보는 모정과 다르게 방과 마루로 되어
있다. 방은 대개 작은 규모로 책이나 생활용품을 넣어두기 위해
만들어진 듯하다.
담양 정자 여행의 시작은 독수정에서 시작하였다. 독수정(獨守亭)은
다른 조선시대의 정자들과 다르게
독수정(獨守亭)을 창건한 서은 전신민(瑞隱 全新民)은 고려말
공민왕대에 북도안무사(北道按撫使) 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고, 고려가 멸망하자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이곳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특이하게
북쪽을 향하여 지었는데 망한 고려를 향하여 매일 절을 하기 위해
그렇게 지었다고 하며 주변에 심어진 나무들이 중국 원산인 자미나무,
회화나무 등이고 독수정이라는 이름도 이백의 시에서 가져왔다 하니
조상들의 중국에 대한 사대의 정신에 씁쓸할 뿐이다.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
(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능주에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십여 년 동안 꾸민 원림이라고 이라고 한다. 정자
중 소쇄원은 그 규모나 풍광이 제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 정자를 세워
사람이 가고 오고 마흔 해로다
시냇물 서늘히 벽오동 아래로 흐르니
손님이 와서 취하고는 깨지도 않네
(소쇄원 초정(草停)에 부치는 노래) 송강 정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80쪽」
취가정(醉歌亭)은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고자 후손들이 1890년에 지은 정자다.
김덕령은 임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고경명, 곽재우 등과 함께
크게 활약했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다.
취가정(醉歌亭)이라는 이름은 정철의 제자 권필(1569~1612)의
꿈에서 비롯되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 장군은
어느 날 권필의 꿈에 나타나 한 맺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불렀다는 것이다.
환벽당(環碧堂)은 김윤제(金允悌)가 을사사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담양으로 내려와 서재를 짓고 칩거한
곳이라고 한다. 취가정과 지척에 있다.
송강정(松江亭)은 그가 벼슬길에서 물러나 4년 동안 머물며
사미인곡을 썼다고 한다. 내용은 한 여인이 남편을 이별하고
사모하는 정을 기탁해서 읊은 것이지만 임금에 대한
연군지정(戀君之精)을 읊은 노래라고 한다.
송강의 다른 시 한편을 감상해 보자.
장진주사(將進酒辭)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셈하면서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에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꽃상여 만인이 울며 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른 해, 흰달, 가는 비,
굵은 눈, 쌀쌀한 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2쪽」
유홍준은 그의 시를 이렇게 비판했다.
'더더욱 마지막 구절 “원숭이 휘파람”이라는 표현은
아주 못마땅하다. 송강은 원숭이를 본 일도 없었을뿐더러
동시대 독자인들 그런 이국의 짐승을 알 리 만무한대 왜,
그것도 마지막 구절에 집어넣었을까? 만약에 ‘송장메뚜기
뛰놀 때‘라고 했으면 확연의 그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이 시를 읽으며 선비들의 유유자적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이 시를 쓴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년 전이다.
당시 백성들의 삶과는 너무 간극이 큰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술이나 무진무진 먹자고 하는 이유는 임금이 자신을
불러주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
들은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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