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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이 바라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독서 2017. 12. 27. 15:37
소시민이 바라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예전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관한 서적은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나 보는 책으로 간주되어 일반 사람들이 그런 책들을 사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좌경의식을 가진 대학생들이 북한이나 다른 나라에서 흘러 들어온 책으로 사상학습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이것이 발각되면 보안법에 위배되는 것은 물론이고 빨갱이 취급을 받았었다.
남한과 북한이 대치한 지 72년(1945년 기점). 6.25의 살상, 납치, 무장공비 등 민족적 냉전으로 서로를 불신하며 사는 동안 공산주의 서적을 허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던 좌경서적들을 일반 사람들도 마음대로 사볼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지만 남북한 화해와 공존을 바라는 의식 변화로 인하여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수를 자처하는 대통령들의 9년 집권 동안 남북 상호 신뢰 회복과 경제 교류 그리고 대화 통로마저 단절되고 말았지만 사회주의 서적들까지 금서가 되지는 않았다.
사회주의 서적들을 읽는다고 자본주의자가 사회주의자가 되고, 사회주의자가 자본주의 서적을 읽는다고 자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소박한 염려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상호비교, 비판과 성찰을 통하여 발전의 계기가 될 것 같다.
어쨌든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사회주의 폭력 혁명을 지향하던 체 게바라나 평화적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스콧 니어링의 책 등을 자유롭게 볼 수 있을 만큼 이제는 자본주의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스콧 니어링은 1883년에 태어나서 1983년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자본주의의 분배구조의 모순을 비판하고 평화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산 사람이다. 그의 사회주의는 미국사회에서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대학에서 해직 당하고 평생 동안 차별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과 이론을 굽히지 않고 저술 활동을 하며 시골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며 채식으로 일관하는 삶을 살다간 사람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불합리한 분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평화적인 혁명을 통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는 사회주의자가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에게 최대한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차원에서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협동적인 사회유형을 계획하고 건설하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둘째, 미국의 대기업가들은 정치권력에 의지해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공동생산기술에서 기인하는 막대한 이윤을 누린다.
세 번째 이유는 사회적인 것이다. 개인주의적인 사기업사회는 19세기 내내 경쟁을 부추겨 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사회는 전쟁이라는 가장 차원 높은 경쟁을 통해 파괴와 살인이라는 끔찍한 수확물을 거둬들였다.
네 번째 이유는 인생의 참된 목적과 관련이 있다. 이것을 윤리적 이유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목적을 따져보기 위해서 인생의 주된 목표가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가능한 한 자신의 숙명에 순응하며 살고, 동료들에게도 자기와 똑같은 기회가 돌아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스콧 니어링 자서전. 244쪽)
스콧 니어링의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하는 위의 이유 중에서 둘째와 셋째 이유는 타당한 것 같다. 하지만 첫째와 네 번째 이유는 꼭 그렇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공동소유와 공동생산을 통해 사회구성원 모두의 발전과 사회개선이라는 이유는 빛이 바랜 이론일 뿐이다. 사회주의를 실시한 어느 나라에서도 이 명제를 성공시킨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개인적 소유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때문에 협동생산의 비효율성과 품질의 질적 저하는 어떤 생산 수단이나 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원초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소비재의 조잡성과 생산성 부족은 협동생산이 단지 이론적 가설일 뿐임을 말해준다. 우리나라 국영(공공)기업체의 비효율성과 적자의 누적도 결국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인간 본래의 심리구조에서 오는 노동의 의욕 부족과 창의력 상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네 번째 이유로 든 인생의 주된 목적이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는데 자본주의의 물질적 삶보다는 사회주의가 더 유리하다는 주장도 이해하기 힘들다.
개인의 창조적 활동은 개인에게 자유가 더 많이 주어졌을 때 가능하다. 협동적 생산과 공동소유에서 개인의 창조활동은 제약되고, 최소의 물질적 삶을 강요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인간의 삶이 건강할지언정 풍요롭지는 못하다. 21세기 경쟁의 시대에서 공동체적 삶으로는 창조적 생산을 기대하기 어렵다. 첨단 벤처기업을 이끌어 가는 젊은이들은 무한대의 상상력과 자유를 통하여 자신들의 꿈을 실현해 가며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 또한 예술과 문학이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적만을 위해서 만들어질 때 그것은 권력 지향적인 하수인에 불과할 뿐이다.
스콧 니어링은 개인주의를 ‘상한 갈대’라고 했다. 오로지 혁명적인 변화만이 자본주의 체제라는 낡은 케이스를 부수고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세력과 제도를 위한 길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혁명에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 그가 주장하는 평화적 혁명은 무력 혁명보다도 멀고 요원한 현학적 이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결점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주고 있다. 자본주의의 결점을 드러냄으로써 자본주의가 가야할 모범답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의 생산 방식으로 효율성을 높이고 공정한 조세제도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정책에 더 많이 투자하고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공동체적 삶은 생산적 복지를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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