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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남북공동성명과 4.27 남북선언문산문 2018. 4. 30. 12:53
7.4 남북공동성명과 4.27 남북선언문
우리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 이념과 체재가 다른 형태로 각자의 길을 가고 말았다. 정부가 수립된 지 3년 만에 북한의 도발로 6.25라는 민족 전쟁이 발발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 시설과 재산의 피해를 입었다. 3년 동안의 전쟁이 끝나고 남북은 종전이 아닌 휴전의 상태로 65년이 흘렀다. 그사이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과 남한의 응징(실제 행동은 못했지만)표시로 남과 한시도 마음 편하게 지내는 날이 없었다.
그런 긴장 속에서도 박정희 정권은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남한과 북한
긴장상태 완화, 상대방 중상비방 중지
무장도발 중지,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고 방지 합의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 제반 교류실시
적십자회담 성사 적극 협조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개설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엄숙히 약속하는 것 등이었다.
그렇지만 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남과 북은 전쟁과 긴장의 악순환 속에서 살아야 했다. 전두환 정부시절에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 세계인의 참여를 위하여 공산국가를 마냥 적대시 할 수 없었고, 1984년 남한에 큰 수해가 났을 때 북한에서 남한을 돕기 위해 보내온 물자를 받았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이른바 북방정책으로 구소련과 외교를 정상화하는 등 나름 남과 북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김영삼 정부는 처음에는 북한과 적대시 하다가 나중에는 김일성과 김영삼 두 정상이 만나 남북회담을 하기로 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햇볕 정책’을 실시하여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문, 2007년 10.4 남북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남북이 평화 공존의 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남북 이산가족 상봉, 스포츠 남북 단일팀과 공동 입장, 문화예술 교류,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설립 등으로 이어지며 남북이 평화와 화해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그간의 남북의 선언과 합의를 번복하고 ‘북한 붕괴론’을 신봉하며 다시 대결과 긴장의 시대로 회귀하고 말았다. '보수'라고 자처하던 두 대통령이 남북 관계를 망쳐 놓고 물러난 후 문재인 정부가 수립되고 일 년이 채 안된 2018년 4월 27일 남과 북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남북 화해의 노력에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감동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과 두 영부인 그리고 수행원들이 만나는 장면은 전 세계에 실시간 중계되었다. 12시간의 만남은 감동적인 다큐멘터리였다. 그간의 응어리들을 삭혀낼 수 있는 단초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휴전협정을 종전 선언’으로 대체하자는 큰 틀의 선언문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그 정점을 찍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이념 논쟁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희망이 보인다. 한반도에서 핵과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남한과 북한이 공존과 평화의 길로 한 발자국씩 전진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남한과 북한이 가깝게는 공존으로, 멀리는 통일로 갈 수 있다면 미래에 이 땅에 살아야 할 우리 자식들에게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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