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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과 이태원
남한산성을 찾아가는 길에 비가 내리는데 길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들이 참 아름답게 물들었다. 남한산성의 역사를 생각하며 가는 길이라서 그 길이 무척 처연하게 느껴졌다. 남문 성루에 올라 성벽을 따라 걸으며 기왓장 위에 내린 낙엽과 빗물 그리고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을 바라보며 잠시 비감에 젖었다. 백성들의 피가 눈 덮인 산하를 시뻘겋게 물들였을 처참한 광경을 그리며 남한산성 남문에 올라 성벽을 따라 걸었다. 비는 오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데 성벽 위 기왓장에 내려앉은 낙엽은 말이 없다. 남산산성을 한 시간 정도 걷는데 색색으로 물든 단풍은 그냥 곱게 물들어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도 조선의 왕과 신하들은 임진왜란 때의 수모와 비극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고 그 놈의 주자학에 목을 매고, 추상적인 사고로 논쟁을 하며 세월을 낭비하다가 다시 맞은 조선 최대의 비극.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가 배겨나지 못하고 결국 왕의 상징인 어의(御衣)를 벗은 채 정월 마지막 날 삼전도에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을 했다. 정월 매서운 삭풍을 맞으며 눈 덮인 나루터에 나가 하루 온종일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 할 때 이마에서 피가 나도록 땅에 찧어야 했던 1637년 1월 30일. 아마 하늘도, 땅도, 바람도, 나무도, 구름도 치욕으로 떨었을 그날!
인조의 치욕은 거기서 끝났겠지만 포로로 잡혀 청으로 끌려갔던 50만 내지 70만의 백성들. 눈 덮인 산하. 살을 에는 설한풍을 맞으며 장장 2천리를 끌려가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 임지왜란 때 귀 잘리고, 코가 잘리고, 겁탈을 당했던 수많은 백성들. 그 처참한 비극의 역사를 다시 반복하게 했던 무능한 왕과 신하들. 청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도망치다가 잡히면 도끼로 발뒤꿈치가 잘리는 보복을 당했던 백성들. 그 원혼들이 있다면, 정말 있다면 후에 후손들로 하여금 원수를 갚게 했겠지만 죽으면 혼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인간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청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다 되돌아온 여자들,
환향녀(還鄕女)들에게 엎드려 빌어도 부족할 판에 화냥년으로 욕하며 사갈시했던 사대부들, 그들이 잉태한 자식들을 호로(胡虜)자식이라며 욕하고, 자식으로 며느리로 어머니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랑캐 자식을 가졌다는 의미의 땅, 이태원(夷胎院 혹은 異胎院)이라고 이름을 붙인 땅에 살게 하며 보호는커녕 백성으로 인정받지 못한 불쌍한 여성들. 지지리도 못난 왕과 사대부들. 위선과 독선이 오늘까지 내려와 언어 속에 남아 있는 말, 호로자식, 화냥년. 지금은 그럴싸하게 이태원(梨泰院)이라 부르고 있다.
그 못된 전통은 6.25때 대통령과 관료들은 미리 도망친 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거짓 방송을 녹음기에 걸어놓고, 백성들이 한강을 건너고 있는 그때 대피도 시키지 않고 다리를 폭파해 수많은 사람을 죽게 했고, 서울 수복 후에는 죄 없는 백성들을 공산당에 부역했다고 재판도 없이 무참하게 살해했던 무능하고 독한 지배층들이 있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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