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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창호문과 전원주택 통유리산문 2019. 2. 4. 21:28
한옥 창호문과 전원주택 통유리
2월 3일 일요일 새벽, 설(5일)을 앞두고 겨울 가뭄으로 바짝 말라버린 대지를 적시는 비가 내렸다. 새벽 잠결에 비 오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새벽이라서 사위는 한층 고요한데 비가 내리니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귀 기울이지 않아도 봄을 재촉하는 빗소리는 촉촉하게 귀를 적신다. 조금은 허술한 방문에 바른 창호지를 통과한 소리는 유난스럽던 미세먼지가 다 걸러진 맑고 투명한 몸짓으로 찾아온다.
낮에 고속도로는 고향을 찾는 차량행렬로 막혀 답답하게 종일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고향을 찾아 멀고 지루한 운전을 참아가며 고향에 있는 부모와 친지를 찾아 명절 때마다 민족 대이동을 한다. 기차와 버스가 주요 운송 수단이었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자가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귀향하는 모습이 달라졌듯이 고향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마을에 부잣집 두서너 집을 빼곤 거의가 초가집이었지만 지금은 고향 마을에도 초가는 찾아볼 수가 없다. 초가를 보려면 민속마을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다 사라져버렸다. 초가가 사라진 자리에는 국적불명의 집들이 들어서 있다. 변화하는 세태를 따라 주거의 형태도 바뀌어버리고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고향마을에는 멋진 전원주택들이 들어서고 한옥에서 볼 수 있었던 창호지를 바른 방문 대신 멋진 외관에 어울리는 커다란 통유리가 붙은 창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번쩍이고 있다. 커다란 통유리는 옛 창호문과 다르게 안에서는 밖의 모습이 잘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단절된, 완전히 주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다소 오만한 창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야에는 밖의 모습이 잘 보이지만 안과 밖의 소리를 차단한 단절의 창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통유리와 달리 한옥의 방문에 바른 창호지는 얇아서 안과 밖의 소리를 차단하지 않는다. 통유리와 달리 차단하는 것은 귀가 아니라 눈이다. 때문에 여린 바람소리, 이슬비 내리는 소리, 작은 새들이 소리, 풀벌레소리, 건너 마을에서 태고의 신비함을 간직하기라도 한 듯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소리, 마을 안쪽에서 싱겁게 짖는 강아지 소리는 물론 조용한 겨울밤 사르락 사르락 눈 내리는 소리까지 남김없이 전해주는 상징적인 차단 장치였다. 닫았지만 열려있는 장치라고 해야 할까. 통유리처럼 멋지지도 않고 방음 기능이나 열 차단 기능이 떨어지는 창호지 바른 문은 무척이나 차단 기능이 허술하고, 세월 따라 묵어가며 늙은 노부부의 삶의 궤적처럼 퇴락하고 고졸(古拙)한 모습으로 아귀가 틀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방안에 누워 아늑한 고요 속에서 들리는 소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잊고 살았던 세월과 멀고 먼 조상들의 역사까지 상상하게 된다.
조상들은 그런 주택 구조에서 안방 윗방에 시부모와 자식 부부가 살며 많은 자식들을 낳고 살았다. 그 삶이 얼마나 조신하고 삼가하며 살았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이중 삼중으로 차단된 밀집된 공간에서 살면서 윗집 아랫집이 소음으로 살인까지 저지르는 세태이니 예전에 비해서 삼가고 조신했던 조상들에 비하면 삼가하며 살지 못하고 살고 있는지 비교가 된다.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다운 삶의 모습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