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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르스와 소설 2
    산문 2015. 6. 23. 15:36

     

    눈먼 자들의 도시

     

    포르투갈의 사라마구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

     

      인간이 시력을 잃는 건 죽음 다음으로 절망과 상실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닐까.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을 보며 눈이 멀었다는 게 단순히 육체적 고통을 의미할 것 같지는 않고 또 다른 은유를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먼저 떠오른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대한 집념으로 인간에 대한 본성이나 윤리적 부끄러움을 상실한 세태와 그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에 대한 욕망을 쫓는 인간의 행태와 치부를 드러내는 내용이지 않을까라는 추측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구석구석에 빨대를 꽂고 게걸스럽게 식탐을 해대는 자본의 악랄함과 치밀함에 사람들은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그런 자본의 속성에 물들어가며 그저 편리함 때문에 거대한 자본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지고 있다. 소설 속에서 깡패들이 독점한 음식과 성폭력에 저항 없이 길들여지는 눈이 먼 보통 사람들처럼 우리는 자본의 제공하는 편리함에 물들어 나른하고 무력한 삶을 비판 없이 살아가고 있다.

     

      첫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며 인류역사에서 창궐했던 질병들을 떠올랐다. 콜레라, 홍역, 매독, 광견병, 흑사병, 감기, 에이즈, 사스와 조류독감 그리고 가축의 살처분이라는 사실상 학살로 이어진 구제역 같은. 전염병은 인간을 죽음의 공포에 몰아넣었고, 전염병 앞에서 인간은 무력했다. 권력은 늘 전염병의 확산방지를 위해서는 어떤 가혹한 조처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 그런 인간들의 끔직한 행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백색눈병이 발병하고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하며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정부는 환자들을 정신병원에 격리 수용하며 전염병을 차단하려 했지만 병은 걷잡을 수 없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염된다. 갑작스럽게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자 생산, 수송이 멈추고 전기와 수도도 끊기게 되며 도시는 죽음의 도시로 변한다. 배가 고픈 사람들은 음식을 찾아 헤매다가 죽음을 맞게 되고, 거리에는 널브러진 시체들에서 악취가 풍기게 되고, 주인을 잃은 눈이 멀지 않은 개들은 시체를 뜯어먹는 지옥이 되고 만다.

     

      처음 눈이 먼 사람들은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군인들이 지키며 밖으로 나가는 행동이 금지된 채 단지 배달되는 음식만으로 생활하게 된다. 우리에 가두어두고 먹이만 넣어주는 짐승처럼이나 다름이 없다. 생리를 하는 여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물건도, 환자가 생겨도 약이 지급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이들이 서로를 죽여서 한 사람도 남지 않기를 기대한다. 갑작스럽게 눈이 먼 사람들은 먹는 행동, 화장실에 가는 행동 등 일상생활이 서툴고 어렵지만 눈 뜬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백색눈병의 전염성 때문에.

      맨 처음 눈이 멀어 제일 먼저 수용된 제 1호실의 40명 중에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는 백색눈병에 전염되지 않는다. 아내는 눈이 보이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 병원에 따라가 눈먼 사람처럼 행동하며 모든 비극을 남편과 같이 겪는다. 병원에 수용된 사람들의 비극을 더 참혹하게 만든 건 역시 사람이었다. 환자들의 고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정부 그리고 나중에 병원에 들어온 깡패 두목의 병원 장악으로 눈먼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돈과 귀중품을 강탈당한 후 적은 양의 음식을 받게 된다. 빼앗을 물건이 없자 깡패들을 각 호실에 여자들을 불러내어 강간과 윤간을 한 후 그 대가로 남편, 자식들에게 음식을 가져가게 한다. 깡패들의 그런 폭력 앞에 저항할 용기 혹은 생각조차 없는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남자들의 모습은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의 허약한 지식인 혹인 생활인의 모습일 수도 있다.

      수치스러움조차 없이 깡패들의 폭력에 굴복하고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하는 남자들을 일깨운 건 눈이 멀지 않은 안과의사의 아내였다. 이미 깡패들에게 강간과 윤간을 당해 수치심과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게 더 모멸스러운 아내는 깡패 두목을 죽일 결심을 하고 깡패들이 다른 호실 여자들을 불러들일 때 몰래 그들의 뒤를 따른다. 깡패 두목이 쾌락을 느끼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순간 아내는 두 개의 단검처럼 목을 꿰뚫을 수 있도록 가위의 양날을 약간 벌려 두목의 목을 내리찍었다. 순간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목에는 피가, 성기에서 정액이 튀기며 죽는다.

     

      안과의사의 아내가 깡패 두목을 죽인 후 배가 고픈 남자들은 두목을 죽인 여자를 찾아 깡패들에게 넘겨주면 음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전달한다. 더는 사람들을 굶주림에 지치게 할 수 없었던 아내가 자기가 죽였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의 팔을 잡는 사람은 남편이 아닌 원래 눈이 하나 멀었던 노인이었다.

       “수치심이라는 것이 지금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를 죽일 용기를 가졌던 사람 덕분이기 때문이오.”

       “우리는 우리 분수에 맞지 않은 마지막 한 조각의 존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 이제 우리에게도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하는 것을 찾기 위해 싸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수치심도, 자존심도, 용기도 없는 남자들에게 물리적, 심리적으로 남자로 되돌아갈 것을 북돋아준 사람은 나이가 가장 많은 노인이었다. 늙은 사람들에게 존재의 가치조차 부여하지 않은 새태에서, 늙은 것은 단지 육체적 노쇠가 왔을 뿐 정신만은 젊은이 못지않다는 걸 그래서 젊은이 보다 먼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깡패들을 몰살시킨 건 깡패들에게 죽음보다 절망적인 수치를 당한 눈이 먼 한 여자였다. 여자는 라이터를 찾아내어 깡패들이 자신들의 방에 만들어 놓은 바리케이에 침대의 이불을 걷어내어 불을 지른다. 아무도 몰래 혼자서. 극한 상황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인간이 눈이 먼 후 나타나는 인간성의 상실과 오로지 본능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비극적이고 참담한 인간의 모습과 강한 자들에게 자신의 권리조차 쉽게 포기해버리는 무력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게 되다. 이런 나약한 인간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1호실 여자들의 남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 여성의 모성에 바탕을 둔 선함에 주목하게 된다. 1호실에는 여자 일곱 명과 아이를 뺀 서른 한 명의 남자가 있다. 남자들의 식욕과 성에 대한 욕망은 어떤 것이 더 본능에 가깝다고 말하기 곤란한데, 눈이 멀고 배가 고픈 것과 마찬 가지로 성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남자들에게 여자들은 기꺼이 욕망의 대상이 되어준다. 이런 여자들의 행동은 생명을 품어 키우는 대지의 모성처럼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희망의 종자가 아닐까.

      폭력을 멈추게 한 것도, 남자들의 성적 욕망을 자발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도 그리고 눈이 멀지 않고 마지막까지 1호실의 사람들이 눈이 뜰 때까지 음식을 구해와 먹여 살린 것도 여자였다. 작가가 우연히 그렇게 쓴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작가는 여자에 의한 구원만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본 게 아닐까?

      그리고 단 한 사람 눈이 멀지 않고 비극적인 사실을 자신의 스스로 눈이 먼 척하면서 지켜본 사람도 안과의사의 아내였다. 어느 날 인류에게 소설처럼 절망적인 일이 생겼을 때 남자들은 정말 구제 불능의 무기력한 존재들이라는 암시를 이 소설을 통해서 하는 건 아닐까? 잉태와 양육의 모성만이 인간의 비극을 해결하는 목적이고 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는 그래서 다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소설에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먼저 눈이 먼 사람, 안과의사, 안과의사의 아내 등. 외국소설을 읽을 때 길고 생소한 이름 때문에 책을 한참 읽다보면 혼란이 와서 다시 앞 쪽으로 돌아가서 이름을 확인하거나 작은 메모 용지에 이름을 써놓고 확인하며 읽어가기도 하는데 이름이 아닌 직업이나 특징을 이름 대신 쓰는 방식이어서 이름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아 나처럼 외국 이름 기억하기가 어려운 사람에게는 오히려 이런 방식이 책을 읽기에 더 편했다. 작가가 이름을 쓰지 않고 그런 식의 익명성으로 소설을 쓴 이유는 정확이 알 수 없지만 어차피 눈이 멀어 비극적으로 죽어가는 도시에서 사람의 이름은 무의미하고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이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이름이 아닌 비극에 노출된 그저 한 사람의 시민일 뿐 개인의 존재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동질성을 지닌 불행한 대상이라는.

     

      이 소설을 읽으며 정유정의 28과 서사 구조나 전개 방식이 너무 흡사해서 놀랐다. 정유정의 소설이 전염병으로 일어난 참상이 훨씬 생생하고 긴장감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반면 이 인간 행동에 대한 사유가 좀 더 깊다는 생각을 했다. 두 소설에서 갑자기 전염병이 번지고 환자들을 격리해서 일반사람들에게 번지지 않게 하는 대책은 지금 메르스가 환자와 접촉자들 그리고 환자가 발생한 동네를 출입금지 하는 건 소설과 현실이 동일하다. 격리된 사람들의 심정은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치안의 부재에서 오는 악당들의 괴롭힘으로 전염병을 앓은 사람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주는 것과 차이가 있을 뿐.

      소설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가능성의 연장이다. 생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말한다. ‘소설 같다. 혹은 소설을 쓴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 충격적이고 어이없는 경우가 많다. 이번 메르스 사태도 그렇다. 메르스에 대한 정상적인 대처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격리되고, 죽지 않았을 것이며, 사람들이 메르스에 걸릴까봐 전전긍긍하며 불안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과 현실 어느 쪽이 더 공포스럽고 또 희화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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