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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AD에는 길이 없다
코맥 매카시 미국
메르스가 아직도 물러가지 않고 사망자도 늘어나고 있다. 메르스가 종식되지 않고 끊어질 듯 계속되는 걸 보며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인류에게 닥칠지도 모를 지구 종말을 상상해 본다. 인류에게 재앙은 어떤 식으로 찾아올 것인가? 핵전쟁, 지구 온난화,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생각지 못한 부작용, 항생제나 어떤 약으로도 죽일 수 없는 바이러스의 전염병일까? 메르스가 진정되지 않은 걸 보며 국지적인 질병으로 겪는 불행이 아닌 전 지구적인 재앙을 다룬 소설에 대한 감상을 적어 본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내 몸에서 기름기와 수분이 빠져나가며 미라가 된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대재앙으로 자연은 파괴되고 인간들은 거의가 죽은 황폐한 지구. 차라리 죽은 사람이 살아남은 사람보다 다행일 듯한 환경. 살아남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이 사라진 삭막하고 추위가 계속되는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와 어린 소년의 모습은 불행한 지구의 미래의 예고편처럼 아리게 다가온다.
식물이 자라지 않은 대지 위로 뼈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몰아치고 먹을 것이라고는 대재앙이 오기 전 사람들이 남긴 부패되지 않은 통조림이나 건조된 식품들 뿐. 그나마 남은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약탈해 갔고, 남은 건 파괴된 건물과 죽은 나무들뿐이다. 그 절망적이고 황폐한 길 위에 아버지와 소년이 방수포와 담요를 뒤집어쓰고 약탈자들을 피해 카트를 밀며 막연한 남쪽을 향해 가고 있다. 지옥에 떨어지면 그런 삭막하고 황폐한 모습일까. 아니면 성경의 묵시록에 예언된 지구 멸망의 처참한 모습이 그런 모습일까.
코맥 매카시는 참 불친절한 작가다. 왜 그런 대재앙이 왔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또 아버지와 소년의 마음에 대해서도 함구한다. 아버지의 심리상태가 어떤 것인지 기술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그가 왜 남쪽으로 가려는지, 거기에 가면 어떤 희망이 있는지, 거기에 가면 살아갈 수 있는 자연이 있는지 등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아들을 보호하며 걷고 또 걷는 여정에서 보여주는 극한 상황에서의 사느냐 죽느냐의 절박함과 추위와 배고픔의 절절한 아픔만이 느껴질 뿐이다. 인물의 마음이 표현되지 않는 다만 눈에 보이는 절망적인 모습만을 건조한 문장으로 기술함으로써 인간에게 절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두 사람이 걷는 여정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캅카스 산의 바위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고통을 당하고, 밤이면 다시 간이 회복되고 다시 쪼이는 고통을 당하는 광경이 연상된다.
신발을 아끼기 위해 천과 방수포로 발을 감싸고 남쪽을 향해 한없이 걸어야 하는 여정에서 만나는 강도와의 싸움에서 피를 뒤집어 쓴 소년, 굶주림에 체념한 노인, 혼자된 다른 소년과의 만남에서 소년은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연민을 가진 불씨 같다. 아버지에게 그들을 데려가자고 하지만 그들과의 동행은 두 사람의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임을 아는 아버지에 의해서 거절될 때 조금이라도 더 음식을 주라고 조르는 소년, 멸망한 지구에서 아직 죽지 않은 선의 씨앗으로 존재한다.
허기지고 추위에 지쳐 걸을 기력조차 없을 때 라이터를 잃어버려 불조차 피우지 못하고, 담요만으로 추위를 견디며 잠을 청하는 모습에서는 나의 몸이 덜덜 떨리며 기진해서 털썩 쓰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버지는 병에 걸려 수시로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한다. 하지만 어린 아들이 남쪽의 땅에 닿을 때까지 결코 죽을 수 없기에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기 직전에 여기저기를 뒤져 먹을 것을 찾아내고, 다시 기력을 회복하여 걷는다. 유일한 희망인 남쪽을 향해서.
끊임없이 두 사람을 위협하는 약탈자들. 사람들이 가진 것을 약탈하고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한다. 약탈자가 아닌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아기를 구워먹다가 그들을 발견하고 도망간 자리에서 소년은 묻는다.
“우리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을 거지?”
“그래.”
“배가 고파도 잡아먹지 않을 거지?”
“응.”
아버지와 아들이 세상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어떤 말이 이보다 참혹할 수가 있을까. 소년은 착한 사람에 대하여 묻는다. 죽음, 추위, 약탈자 그리고 그보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 소년이라면, 대재앙으로 파괴된 지구에서 살아남아야 할 필요충분조건을 가진 희망이 아닐까. 천신만고 끝에 남쪽 가까이에 와서 아버지는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는 죽어가며 말한다.
“불을 운반해야 한다.”
“그게 뭔데?”
“네 안에 있는 불.”
아버지가 말한 그 불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소년은 모른다. 어떤 부차적인 설명도 아버지는 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나도 모른다. 다만 추측한다. 그 불은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라고.
혼자가 된 소년은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하다가 구원자를 만난다. 소년은 묻는다. 당신은 착한 사람이냐고. 구원자는 말한다.
“너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여기에 남든가 나를 따라 가든가.”
결국 소년은 산탄총을 맨 구원자를 따라 나선다. 그에게는 그 소년만한 아들과 딸 아내가 있다. 그의 아내가 소년을 포옹하면 소설은 끝난다.
과연 소년과 구원자의 가족은 폐허가 된 지구에서 봄을 맞을 수 있을까.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그 여정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 어제 했던 일을 오늘 해야 하고 또 내일도 해야 하는 ‘과거가 현재이고 현재가 미래’인 그러면서 희망이란 말을 꺼내기 힘든 건조한 현대인의 삶의 모습이 아버지와 소년의 모습에 다름이 아닐까.
우리는 부성보다 모성이 훨씬 강하다는 걸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모성이 아닌 부성이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아버지와 소년이 아닌 어머니와 소년이라면 소설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상상해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영화 ‘에어리언’에 등장하는 여전사 시고니 위버 같은 남성 못지않은 어머니일까. 아니면 한없이 약하고 나약한 어머니가 자신을 희생하며 아들을 지켜주는 내용일까. 마음속에 또 하나의 소설을 써보는 것도 이 책을 덮으며 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독서법이 되지 않을까. 내가 작가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작가의 소설에 내 생각을 덧붙여 소설을 전개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리하여 이 소설의 절망적이고 극한 상황에서 과연 나는 어머니와 소년에게 어떤 서사구조를 적용하며 소설을 전개할 것인지 생각한다면 이 책을 좀 더 심도 있게 읽어내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