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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독서 2024. 10. 12. 15:47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 불꽃으로」 이어지는 한강의 소설에 대한 찬사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내 독서 성향이 남들이 다들 좋다고 하는 베스트셀러는 엉덩이 뿔난 송아지처럼 거부하고 보는, 독특하다기보다는 ‘나는 당신과 다를 수 있다’는 차별적인 선택으로 근거 없는 혹은 되바라진 건방과 자만이라는 사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논리나 타당성도 없는 개폼을 잡는다고나 할까. 그 선택의 남다름은 어쩌면 사람들과 경쟁에 나서지 않겠다는 아니 나서기가 겁이 나는 비겁함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무조건 거부해서 자신은 다르다고 믿는 억지 입장 같은 것이나 회피의 정신 승리.
그럼에도 이 책을 읽게 된 건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이 뉴욕 타임지가 선택한 2016년에 읽어야 할 10권의 책 중에 선정되었다는 소식과 노벨문학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라는 맨 부커상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호기심 때문이다. 고은 시인이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오르면서도 상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웠던 상처 입은 서운함에 대한 대체 만족감도 조금은 있었고.
책을 사서 조금 읽다가 이미 읽은 책이라는 걸 알았다. 제목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국회 청문회에 나온 사람들이 000를 아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지속적으로 부정하다가 사실이 드러나면 ‘나이가 들어서’라던가 하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듯이, 나도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그 책에 대한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그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기 몇 년 전에 읽었던 것 같다.「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그 작가를 다시 기억해내지 못한 걸 보면 내 독서 수준이라는 것이 물에 젖은 화장지처럼 하루 이틀도 견디지 못하고 없는 푸석거리는 시간에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얕은 것일지도.
그 책에 숨어 있는 의미와 암시 그리고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는 뭘까 생각하며 다시 읽었다. 책의 뒤에 나와 있는 작가의 말에 혹시 한 줄의 설명이라도 있을까 했는데 한마디도 없고 책을 쓰며 겪었던 신체의 어려움만 써 있었다. 어쩌면 책이란 작가가 쓴 의미보다 훨씬 훌륭한 평가가 평론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일반적인 의도로 썼는데 읽는 사람들이 전혀 다른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 작품에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을 거고. 그런 경우에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해서 침묵을 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지 않을까.
영혜가 어느 날 냉장고에서 고기를 전부 꺼내어 버린 까닭이 꿈 때문이라고 했다. 일인칭의 독백으로 말하는 꿈 이야기는 유년시절 계곡으로 놀러가서 고기를 구워먹던 일행들과의 실제의 일이 꿈과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고기는 물론 계란이나 우유도 거부한다. 딱히 채식이라기보다는 고기에 대한 강한 거부다. 그녀는 반복적으로 고기에 얽힌 악몽을 꾼다. 물컹하게 씹힌 고기의 감촉, 피 묻은 얼굴, 피웅덩이에 비친 얼굴 온갖 잔인하고 역겨운 모습들이 나타나는 꿈을 꾼다.
남편과 사람들이 그녀에게 왜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꿈 때문이라는 알 수 없는 대답을 할 뿐이다. 그녀는 단지 고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잘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녀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방적인 강요와 설득만 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그녀를 미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버지가 딸의 입을 벌리고 고기를 밀어 넣는 강압적인 무력(폭력)을 행사한다. 이를 거부하는 딸의 뺨을 후려갈기는 순간 그녀는 폭발하고 자신의 손목을 자르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그녀는 병실에서 탈출하여 가슴을 드러내놓은 채 동박새를 물어뜯어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로 벤치에 앉아있다.
그녀에게 육식은 폭력이고 죽임이다. 채식을 하려는 게 아니라 고기를 먹지 않으려 할 뿐이다.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죽임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채식이 악몽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지속적으로 꿈에 나타나는 죽임과 죽임에 관련된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장면들에 시달리며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위로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이 말은
폭력에 대한 강한 거부이고 부정이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와 남편은 각기 일인칭 화법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말한다. 일인칭 화법은 상대를 바라보며 상대를 말을 들으며 상대를 이해하고, 내 말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내 입장만을 표현하는 독백일 뿐이다. 때문에 남편과 그녀 그리고 가족들 사이에는 도저히 허물 수 없는 벽만 남기고 이해와 대화는 단절되고 만다.
몇 년 전 처음「몽고반점」을 읽었을 때 난해하고 불편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며 불편한 감정의 실체를 다시 생각하게 해 보았다. 인혜의 남편은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비디오 아트를 하는 예술가다. 가정생활에는 관심도 능력도 없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무기력한 존재다. 그렇다고 작가로서의 능력이나 자질이 뛰어난 인물도 아니다. 2년 동안 작품을 창작할 능력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는 중이다. 겨우 구상한 작품이 남녀의 알몸에 꽃을 그리고 섹스하는 장면인 포르노그래피를 찍으려고 한다. 가정 경제와 아이 양육을 아내에게 떠넘긴 채 가정 밖으로 겉돌고 있다. 그런 그가 처제인 영혜의 몸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격렬하게 반응한다. 남녀의 벌거벗은 온몸에 꽃그림을 그리고 교합하는 장면 속 여자는 몽고반점이라는 정점에서 꽃잎이 열리는 이미지의 처제여야 하고, 여자의 몸속을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남자는 자신이어야 했다. 그 이미지는 시들했던 자신의 성적 욕망을 강렬하게 자극하고 있었고 또한 그가 구상하는 작품에 대한 완결이기도 했다.
그는 영혜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하여 겨우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 보살펴주거나 도움을 주어야 할 처제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미지를 완성해야 하는 도구로 생각한다. 2년 만에 구상한 작품이 영혜의 몽고반점과 성적 이미지의 환상으로 완성할 수 있다는 강한 성취감만으로도 그를 일렁이게 했다. 또한 작품에 대한 영감을 준 영혜 엉덩이의 몽고반점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그는 시들했던 성적 욕구가 살아나 발기한 수컷이 되어 아내를 덮쳐 대리만족을 얻는다. 영혜를 작품 완성의 대상으로 그리고 자신의 배설 욕구의 도구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와 자식에 대한 책임이나 윤리, 몸이 아픈 처제에 대한 연민은 없었다.
영혜를 설득하여 허락을 받고 그녀의 몸에 꽃그림을 그리며 촬영한다. 그리고 후배가 거부한 교접의 장면을 옛 애인을 찾아가 자신의 몸에 꽃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여 비디오를 완성한다. 영혜와 그는 꽃이라는 공통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비디오를 찍으며 작가가 넘어서서 안 될 경계를 넘는다. 영혜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폭력배가 힘없는 상대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듯이 배설을 하며 욕망을 채운다.
작품에도 건강성이 존재한다. 작품이 건강성을 가지려면 작가는 지속적으로 창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가 작품을 창작할 능력을 상실하고 방황을 거듭하다가 겨우 혹은 우연히 만든 작품은 병들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고갈된 작품 창작의 에너지가 작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나중에는 자신의 작가 능력에 회의하며 좌절에 빠지게 된다. 인혜 남편의 경우가 그렇다. 2년 동안 작품을 만들지 못하다가 놀라운 창작을 하겠다는 욕심은 결국 금기된 선을 넘게 되고, 영혜를 회복할 수 없게 망가뜨리고 자신도 망가뜨리고 만다. 인혜 남편의 작품이 건강성을 상실한 건 창작 에너지나 능력이 고갈되자 작가로서 심한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창작에 대한 욕심만 있고 작품에 대한 영감을 상실하고, 압박감으로 시달린 그에게 모처럼 찾아온 작품에 대한 욕망은 그의 이성과 윤리 의식을 잠식하고 말았다. 비록 작품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건강성을 가지지 못한 작품은 영혜뿐만이 아니라 아내와 가족 그리고 자신도 망가뜨리고, 작품도 빛을 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영혜를 망가뜨리기 시작한 건 아버지의 폭력이었다. 하지만 영혜에게 가해진 폭력은 유년시절 아버지의 폭력만이 아니었다. 정신병원에서 나와 힘들게 버티고 있는 영혜에게 가해진 또 다른 폭력은 뜬금없는 형부의 비디오 아트라는 예술이었다. 아버지의 폭력과 육식, 살상이라는 잔인한 현실과 꿈이 뒤섞인 고통을 겪는 영혜는 육식이 아닌 성이라는 또 다른 폭력으로 인하여 회복할 수 없는 틀 속에 갇히게 된다. 우리가 평소에 겪지 못한 낯선 폭력과의 만남은 인혜 남편이 영혜에게 가한 예술이라는 폭력이다.
고갈된 작품 창작의 무기력함이 영혜의 몽고반점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배설에 대한 욕망으로 발기한 성적 욕망으로 허둥대는 인혜의 남편. 남녀의 몸뚱이에 그려진 꽃과 색체에 헐떡이는 성적 유희를 영혜의 몽고반점으로 마침표를 찍어 비디오 아트를 완성한다. 작가로서의 앵글에 맞추어야 할 자신의 눈을 영혜의 몽고반점에 뺏겨버리고 자신이 앵글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인혜 남편은 충혈 된 눈으로 침을 흘리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빨로 짐승을 사냥하는 한 마리 짐승이었다. 작가라는 본연의 임무, 인혜의 남편 영혜의 형부라는 윤리조차 내팽개치고 영혜의 몸속에서 쾌락에 탐닉하다 주변의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만다.「몽고반점」의 불편한 점이었다.
「나무뿌리」는 「몽고반점」에서 이 소설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나무뿌리」는 사족처럼 생각되었다.
처음 읽을 때는. 그렇지만 두 번째 읽으면서 영혜가 왜 나무가 되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육식,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영혜에게 나무였다.
다시 정신병원에 갇힌 영혜는 육식은 물론 모든 음식을 거부하며 나무가 되기를 염원하는 이상행동을 한다. 한없이 물구나무를 서 있고, 자신의 몸에 뿌리가 나고 잎이 무성하게 돋아나기를 꿈꾸고 있다. 음식에 대한 거부는 물론 주사나 관을 통한 영양 공급도 단호히 거절하며 죽어가고 있다. 남편과 부모도 영혜를 떠난 자리에는 인혜가 홀로 동생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와 육식에 얽힌 폭력이 되살아나며 악몽으로 이어지고 어느 날 갑자기 육식 거부하는 영혜, 겨우 회복되어가던 그녀를 형부의 예술과 수컷에 대한 욕망이 그녀를 회복할 수 없는 병으로 몰아넣었고 이를 지켜보아야 하는 인혜도 점점 영혜의 병에 감염되어 간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만 그녀를 겨우 붙잡아두고 있는 건 여섯 살 아들이다. 아들에 대한 모성이 아니라면 그녀는 영혜처럼 허물어졌을 것이다.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겨우 서 있는 인혜를 응시하며 소설 읽기를 마쳐야 하는 나는 또 다시 불편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카프카의 「변신」이 연관되어졌다. 그레고르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흉측한 벌레(꼭 벌레라고 단정 짓지는 말자. 사고나 병으로 불구가 된 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후 충격으로 자신을 벌레로 스스로 규정지을 수도 있으니까)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놀라고 나중에는 귀찮아한다. 그나마 그를 불쌍히 여기고 밥을 가져다주고 청소를 해주던 여동생마저도 변하게 된다. 그는 스스로 먹기를 거부하고 빈 껍질만 남은 채 죽는다. 부모와 여동생은 그의 죽음에 해방감을 느끼며 직장에 휴가를 내고 여행을 떠난다. 그레고르가 가족을 먹여 살릴 때는 고맙고 소중해서 없어서는 안 된 존재였지만 벌레로 변해 돌보아주어야 하고 이웃에 창피한 괴물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죽음은 가족에게 슬픔이 아니라 돌보아주어야 할 책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 그 동안 받았던 경제적 부채감에서 벗어나는 개운한 날이었다. 우리는 언제라도 벌레가 될 수 있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애정과 대화를 단절당할 수 있는 불안정하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게 아닐까.
마찬가지로 영혜가 병이 나자 남편도 부모도 그녀 곁을 떠난다. 그레고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레가 되었고, 영혜는 폭력과 육식에 대한 악몽으로 나무가 되려고 한다. 두 사람의 모습이 변화된 후 주변 사람들에게 주는 당혹감 그리고 벽을 쌓아 수치스러운 대상과 거리를 멀리하는 가족들. 변화된 그들의 모습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이며 그들과 멀어진 주변 사람들.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동일한 모습, 동일한 일상의 습관을 공유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걸 거부할 때는 유무형의 압박으로 이어지고 결국 견고한 벽에 갇힐 단절 수밖에.
삶과 죽음 사이에는 다만 이해할 수 있는,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일상만이 있을 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한 이해와 소통은 멀기만 한 것인지도 모른다.
※ 2024년 가을 '채식주의자'의 작가인 한강님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나라도 이제야 노벨 문학상의 영광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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