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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풍경
을씨년스런 겨울 플랫트 홈에 군인 한 사람과 소녀가 기차를 기다린다. 소녀가 다가간다.
“385 드라코마만 내세요.”
열한 살 소녀가 희망이라는 티켓을 얻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가혹한 것이다. 소녀는 이미 트럭 운전수에게 성폭행 당하고, 유랑 극단의 오레스테스에게 첫사랑을 느끼지만 그가 동성연애자임을 알고 절망한 후의 장면이다.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소녀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영화는 우중충한 푸른 화면으로 그걸 대신할 뿐이다.
이 영화는 옛 영광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깊은 침묵과 우수에 잠긴 그리스 땅을 시종일관 침울한 푸른 색조에 담아내고 있다. 마치 푸른 색조 속에서 깨어날 것 같지 않은 그리스의 꿈을 영원히 잠재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오레스테스와 두 남매는 이별 직전 바다에 잠긴 검지와 조금 잘려진 손목 조각을 헬리콥터가 건져 올려진 후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는데 이 장면도 그리스의 몰락을 상징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푸른 색조 위에 흩날리는 눈, 비가 내리는 고속도로 위에 두 남매의 희미한 잔상, 결혼식에서 도망쳐 나왔다가 다시 끌려들어 가는 신부의 하얀 면사포 자락, 공연 장소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유랑 극단의 노인들, 기차가 떠난 역의 어둠 속에 희미하고 쓸쓸한 가로등. 겨울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모래에 무릎 꿇고 앉아 성폭행의 고통과 첫사랑의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모래를 헤집는 소녀의 모습에서 누구나 살아가며 겪었을 좌절과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영상은 늘 거리를 두고 인물들의 고독하고 웃음기 없는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느리고 정적인 화면에 달리는 기차마저도 제자리에서 정지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불라가 트럭 운전수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마저도 트럭의 커버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차단한 채 움직임이 없다.
잠시 후 소녀의 얼굴은 어둠에 드러나지 않고 흘러내린 하얀 스타킹과 두 손에 묻은 붉은 피만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슬픔도 분노도 가려진 채 관객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시선을 정지하고 있으라는 듯이…….
불라와 남동생 알렉산더가 독일에 있다는 아버지에 믿음은 어쩌면 우리들의 잃어버린 막연한 꿈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첫사랑에 대한 배신감, 추위와 배고픔, 성폭행의 아픔에 대한 분노와 감정의 분출을 억제한 채 남매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남매가 독일을 향해서 가는 어둡고 긴 여정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람마다 간직하고 있는 희망일까.
국경에 도착한 두 남매는 어둠 속에서 배를 훔쳐 타고 강을 건넌다. 두 남매가 배를 탄 후 화면은 빛 하나 없는 어둠이 지루하게 계속된다. 잠시 왼쪽 화면에 아이들이 보이고 국경 수비대의 외침 소리와 총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다시 어둠, 죽음과 희망의 갈림길을 기다리는 나의 조바심은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잠시 후 짙은 안개 속에 드러나는 동생의 실루엣 그리고 불라의 모습 저편으로 보이는 나무 한 그루. 남매는 독일에 도착한다. 그들의 희망이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한데 나무의 상징은 희망일 수 있을 것이다.
(2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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