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을 대하면 가슴이 저린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전체를 아우르는 고통도 그렇지만 부분적으로 ‘나라면 과연 견딜 수 있을까’라는 부분이 있었다.
친구 인선과 내(경하)가 통나무 아흔아홉 그루를 세우기로 했지만, 이런저런 일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인선이 그 통나무를 준비하다가 검지와 중지를 잘라 접합 수술을 한 후 입원했다. 접합 수술은 끝났지만 3분마다 퉁퉁 부은 두 개의 손가락을 주삿바늘로 찔러 피를 흐르게 하고 아픔을 느끼게 해야 한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린 위쪽 신경이 죽어버린다고 한다.
‘인선의 속삭임이 끊어졌다. 간병인이 바늘 하나를 소독한 뒤 인선의 집게손가락에 가져가, 아직 피가 굳지 않은 봉합된 자리를 서슴없이 찔렀기 때문이다. 인선의 손과 입술이 동시에 떨렸다. 간병인의 두번째 바늘을 알코올에 적신 솜으로 소독하는 것을, 좀 전처럼 인선의 중지를 찔러 상처를 내는 것을 나는 보았다.’
‘수술을 잘됐대.
여전히 속삭이고 있었지만, 통증을 참기 위해 힘을 줘서인지 이따금씩 가느다란 유성음이 단어 사이로 새어들었다.’
접합 수술을 받은 손가락이 아픔을 느끼고, 피를 흐르게 하려고 3분마다 바늘로 찔러 피를 내야 한다는, 환자의 처지에서는 정말 당하고 싶지 않은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니! 손가락을 다쳐 부어오르면 스치기만 해도 아프다. 그런 손가락을 3분마다 찔러 피를 내면 한 시간이면 두 손가락에 각각 20번씩 하루에 480번씩 찌르는 고통을 참아야 한다고 한다. 화장실에 가서도 찔러야 하고, 식사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찔러야 한다. 이런 지독한 고문이 있을까? 퇴원할 때까지 4천 번 이상 찌르는 아픔을 견뎌야 한다.
딱지가 내린 부분이나 미처 내리지 않은 부위에 바늘을 찌를 때마다 내면에 누적된 공포의 기억은 아마 점점 더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어 3분마다 울리는 고통의 알람이 될 것 같다.
잘린 손가락 어디에 그 많은 상처를 낼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입원해서 엉덩이 주사를 맞다 보면 나중에는 근육이 뭉쳐서 바늘이 들어가지 않는 경험을 한 사람은 알 것 같다. 3분마다 접합된 손가락이 찔리는 고통은 아마 지옥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작가는 인선에게 왜 이런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도록 썼을까? 인선은 4.3사건으로 엄마가 당한 고통을 곁에서 온전히 경험하며 살았는데, 먹을 입힌 통나무를 세우고 눈이 내리는 모습을 찍기 위해, 그 검은 나무에 내리는 눈을 찍어 영상으로 남겨, 그 영상이 4.3사건의 아픔을 되새김질하는, 작별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가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인선과 경하가 하려는 그 일이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고통을 겪게 했을까?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 속에서 자꾸만 되살아나서 내 엄지와 검지를 쓸어본다. 꿈에서라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